200만원 주고 "세입자·집주인 반반 나눠라"…재난지원금 대란

중앙일보

입력 2022.08.12 17:21

수정 2022.08.1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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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서울 관악구 신사동주민센터에서 수해를 입은 주민들이 피해신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뉴스1

“겨우 이돈 주면서 집주인과 나누라구요?”

 
12일 오전 11시 서울 관악구 신사동 주민센터. 지난 8일 신림동 등에 쏟아진 폭우로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겼다는 이연화(64·여)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집주인과 (재난지원금을) 반반 나눠야한다”는 주민센터 공무원의 설명을 들은 직후였다. 차상위계층이라는 이씨는 “도배·장판 비용 등도 다 내돈으로 내는데 왜 이돈 절반을 주인에게 줘야하느냐”고 말했다.   
 

침수피해 보상금 알아서 나누라는 정부 

1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 골목에 침수된 물품들이 쌓여 있다. 연합뉴스

기록적인 폭우로 서울을 잠기게 했던 먹구름이 걷히자 재해 현장에선 재난지원금 배분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날 관악구 신사동 주민센터는 재난지원금을 신청하려는 이재민들로 북새통이었다. 행정안전부는 ‘자연재난 구호 및 복구 비용 부담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주택 침수 피해 등을 본 이재민에게 실거주 세대당 200만원을 우선 지원하고 있다. 창구마다 5~6명씩 줄을 섰고 신청서를 쓰는 작성대도 붐볐다. 
 
주민센터 공무원들은 순번이 바뀔 때마다 “집주인과 반반씩 나누라”는 안내를 반복했다. 신림동 반지하 세입자 60대 이모씨는 “가전제품부터 모든 살림살이를 다 잃었고 일도 못하는 건 난데 왜 절반을 집주인에 줘야하느냐”고 물었다. “재난지원금 명목은 집 수리 비용이기 때문”이라는 게 담당 공무원의 답이었다. 수해복구에는 턱없이 부족한 재난지원금을 둘러싸고 세입자와 집주인 간 갈등이 빈번해지자 담당공무원들은 궁여지책으로 “반반”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집주인도 리스크가 있다. 침수피해 재난지원금을 받은 세입자가 갑자기 이사한다면 집 수리비를 부담한 주인 입장에서는 손해다. 세입자가 재난지원금을 나누지 않으면 받아둔 보증금에서 그 금액만큼을 빼겠다고 통보하는 집주인도 많다는 게 세입자들의 전언이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원칙은 실거주자(세입자)가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이지만 둘 사이 다툼이 굉장히 많다”며 “규정이 확실히 있는 것도 아니라서 세입자 동의만 있으면 둘이 알아서 나누도록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취약계층 등에 대한 세심한 대책 마련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신림동 반지하 일대에서 공인중개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30만원이 표준 시세일 정도로 사정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동네인데 재난지원금마저 반으로 나누면 당장 생계에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반지하 5가구가 침수됐다는 신림동 원룸소유주 A씨는 “풀옵션 가전제품 가격 등을 따져도 최소 몇천만원이 깨졌는데 세입자와 건물주 모두가 납득할 만한 지원책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사진 찍고, 직접 방문…재난지원금 둘러싼 실랑이

1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일대 반지하 창문 앞에 폭우로 침수된 물품들이 널브러져 있다. 연합뉴스

재해지역 주민센터에는 곳곳에 “침수 피해 사진을 꼭 찍어두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신사동 주민센터도 마찬가지였다. 한 30대 부부는 “그 난리통에 사진을 찍어둘 겨를이 어디 있냐”며 항의했다. 이에 대해 주민센터 관계자는 “실태 조사를 나가면 확인할 부분이라 사진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있으면 처리가 빨라진다”고 설명했다. 애써 미처 침수 현장 사진을 찍지 못한 채 집을 치우고 주민센터를 찾아가면 지원이 늦어지거나 보류되는 불상사를 겪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당사자 신청이 있어야 지원금이 나오는데 안내가 충분치 못한 점도 혼란이 가중되는 이유다. 동 주민센터를 찾은 이재민은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신고할 정신이 어디있겠느냐”라고 입을 모았다. 김모(67)씨는 “이런 절차가 있는 줄도 몰랐고 주변에서 하라고 말해주길래 물어물어 찾아왔다”고 말했다. 50대 윤모씨도 “집 정리하느라 정신 없는 와중에 신고까지 가서 해야한다고 하니 난감했다”며 “노년층도 많은 동네인데 재난 문자처럼 문자메시지라도 보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구청 관계자는 “현장 접수나 e메일 접수가 원칙”이라며 “현장 실태 조사 때 어차피 의사를 물어보지만 빈집도 있고 놓칠 수 있어 직접 오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난지원금이 언제 지급될지도 미지수다. 재난지원금은 접수→피해 현장 확인→피해금액 결정 등 일정 절차를 거쳐 지급이 결정된다. 관악구에서만 주택 침수 피해를 본 가구 수는 4050명(11일 기준)이다. 4000명이 넘는 주민들의 집을 공무원이 하나하나 직접 방문한 뒤 절차가 진행되는 셈이다. 구청 관계자는 “최대한 빨리 주려고 하지만 단계가 있어 시기를 확답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