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 아베 총리는 중국의 전략적 위협을 예견하고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큰 그림의 안보협력체를 구상했다. 위안부 갈등 등이 작용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 정부를 설득하지 못하자 일본은 한국 대신 인도를 끌어들여 결국 2017년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를 결성했다.
어렵사리 이룬 2015년 한·일 합의
정치·사법적 혼선으로 결실 못 봐
정부의 징용 배상이 현실적 해법
정치·사법적 혼선으로 결실 못 봐
정부의 징용 배상이 현실적 해법
그런데 2021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돌연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양국 정부의 공식 합의”라고 공표했다. 며칠 뒤 강창일 주일대사는 일본에 부임하면서 ‘화해·치유재단’ 해산은 이사장과 이사들의 사퇴 탓이라고 책임을 돌렸다.
한·일 갈등을 더 키운 변수는 징용 배상 판결이었다. 2012년 5월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지적하지 않았으니 징용 근로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청구권이 살아있다며 징용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주심을 맡았던 김능환 당시 대법관은 “건국하는 심정으로”라는 정치적 수사를 써서 논란이 됐다.
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은 대법원에 재상고했고, 일본 정부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겠다며 항의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이끌던 대법원은 뒤늦게 심각성을 깨닫고 새로운 쟁점으로 다시 파기환송할 여지까지 검토하며 해결책에 골몰했다.
그런데 재상고 판결이 지연된 것을 나중에 문재인 정부는 ‘사법 농단’이란 프레임을 걸어 문제 삼았다. 문 정부 들어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재상고 사건을 기각하면서 한·일 관계는 롤러코스터를 탔다.
2005년 노무현 정부의 ‘한·일 회담 문서 공개 대책 민관위원회’는 위안부 쟁점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범위 밖’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965년 회담 도중 한국 측 대표가 일본군 위안부의 청구권을 언급한 사실이 일본 측 회의록에 남아 있다.
징용 근로자의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에 명백히 포함됐는데도 문 전 대통령은 삼권분립을 내세워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을 옹호했다. 그러나 삼권분립이라는 헌법 원리가 국제조약을 위반한 국내 판결의 정당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조약법에 관한 빈 협약’ 서문에는 회원국이 각국 헌법에 빙자하여 국가 사이 약속을 깨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본의 패망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남한 소재 일본 자산 22억8000만 달러를 몰수해 통째로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했다.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본은 무상 3억 달러, 장기저리 차관 2억 달러를 10년간 나눠 한국에 제공했다. 식민지 지배가 없었다면 줄 이유가 없는 자금이었고 청구권 자금이 10년간 한국 경제 성장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윤석열 정부의 선택은 간명하다. ‘화해·치유재단’을 복구하고 당초 예정한 재단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 한국 정부가 징용 피해자에게 먼저 배상하고, 그다음에 포스코 등 수혜기업으로부터 보전받는 것이 현실적 해법이다. 일본 기업을 끌어들이려 하면 문제를 풀기는커녕 갈등만 키울 것이다.
주한일본 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도 이제는 빈 협약을 준수하는 차원에서 이전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봄 직하다. 일제의 한반도 침탈의 중심지였던 서울 남산 통감부 터에 위안부 소녀상을 이전하는 것이 적절한 대안일 수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승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