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서소문 포럼] “OB 맞습니다. 맞고요”

중앙일보

입력 2022.08.0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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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정치팀장

좌천 인사로 힘들었던 시기에 부인과 영화 ‘변호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대선후보 시절 출연한 방송사 예능에선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열창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지극한 애정을 자주 표현해왔기 때문일까. 대통령 지지율 24% 정국에서 ‘노무현 골프 조크’가 자꾸 떠오르는 것도 그 잔상 탓이리라.
 
누구나 들어봤을 오리지널 버전을 짧게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 노 대통령,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조셉 카빌라 콩고 대통령이 골프를 함께 쳤다. 그런데 부시 대통령의 드라이버 샷이 산 중턱 OB(out of bound) 말뚝 선상에 떨어졌다. OB로 단정하기 어렵고, 모두가 미국 대통령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였다. 시라크가 “알쏭달쏭”, 슈뢰더는 “애매모흐(애매모호)”, 후진타오도 “갸우뚱”, 카빌라는 “깅가밍가(긴가민가)”라며 난처해했다. 부시의 절친 고이즈미까지 “아리까리”라고 했지만, 노 대통령은 달랐다. 평소의 직진 스타일대로 “OB 맞습니다. 맞고요”라고 했고 이 라운딩 이후 한·미관계가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계급장 떼고 조언 청했던 노무현
실세 비판한 정두언 부른 이명박
현 참모들 목숨 걸고 쓴소리 해야
 

서소문포럼

노 전 대통령이 박장대소했다는 이 해학의 핵심은 “OB 맞습니다. 맞고요”다. 누구 앞에서든 바른 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노무현 스타일, 그 솔직함과 소탈함, 그것이 부르는 순기능과 역기능 양면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다. 그런데 “OB 맞습니다. 맞고요”는 노무현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그는 참모들에게도 똑같이 솔직하고 반듯한 조언과 비판을 요구했고, 이를 경청했다. 계급장 뗀 참모들과의 격한 토론은 대통령 노무현의 일상이었다.
 
어디 노 전 대통령뿐이랴. 이명박 전 대통령(MB)도 생생한 조언을 늘 목말라했다. 친형인 이상득 의원 측 인사들이 청와대 요직을 장악했던 시절에도 MB는 그들의 대척점에 서 있던 ‘열혈 풍운아’ 정두언 의원(2019년 작고)을 이따금 청와대로 불렀다. 정 의원이 청와대에 다녀간 사실을 실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부속실장의 승용차로 인근 L호텔에서 정 의원을 몰래 실어 날랐다. MB는 정 의원에게 청와대 밖 생생한 여론과 ‘원조 핵관’으로서의 쓴소리를 구했다.
 
윤 대통령이 궁지에 몰렸다. 2008년 초 MB 정부 광우병 사태처럼 해괴하고 몹쓸 선동도 없었다. 그런데도 20%대 지지율 참사가 벌어졌다. 인사와 정책 혼선,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헛발질로 스스로 무덤을 팠다. 하지만 정권의 현실 인식과 반성 수준은 낙제점이다. 지난달 열린 고위 당정 협의회가 대표적 장면이다. 당시 정부 여당은 정책이 국민에게 제대로 홍보되지 못하는 걸 낮은 지지율의 이유로 진단했다. “어렵게 준비한 정책이 묻히지 않도록 총리와 장·차관, 실·국장까지 언론에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해법이 도출됐다. 그 며칠 뒤 나온 “스타 장관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윤 대통령의 훈시도 비슷한 맥락이다. 정부와 여당은 잘하고 있는데 홍보가 덜 돼 지지율이 고전하고 있다니, 황당한 진단에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올 리 없다. 그 이후로도 꾸준히 하락하고 있는 처참한 지지율은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생생한 증거다.


요직을 검찰 출신들로 채운 대통령실과 정부 인사, 참사에 가까운 교육·보건복지부 장관 인사, 혈중알코올농도 0.251% 후보자의 청문회 없는 임명, “대통령을 처음 해봐서” “전 정권 장관 중에 그렇게 훌륭한 사람들 봤느냐”는 언어들, 취학 연령 인하나 52시간 노동정책에 대한 황당한 설명, 끝없는 사적 채용 논란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얽힌 여러 의혹, “내부 총질이나 하는” 당 대표와의 반목과 정치력 부족 등 지지율 하락 요인 중 상당수는 윤 대통령과 김 여사가 자초했다.
 
하지만 지지율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이러시면 안 된다”고 목숨을 걸고 대통령 부부에게 진언했다는 핵관이나 참모들의 미담은 별로 들어 보지 못했다. 제대로 된 ‘핵심 관계자’나 ‘핵심 참모’라면 윤 대통령과 김 여사가 낸 OB에도 “OB 맞습니다. 맞고요”라고 직언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홍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거나, 철없는 여당 대표의 분탕질 때문에 상황이 악화했다는 식의 변명은 응급환자의 치료만 더욱 늦출 뿐이다. 호랑이 대통령 목에 방울 하나 못 다는 분위기라면 인적 쇄신을 아무리 해도 차도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