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외상 “푸이 옹립, 제국의 만·몽 경영에 화근 우려”

중앙일보

입력 2022.08.06 00:20

수정 2022.08.0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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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평민이 된 푸이(중앙)와 여동생(왼쪽 셋째와 오른쪽 둘째)들은 일본의 보호를 받았다. 왼쪽 첫째는 푸이의 스승 천바오첸. 오른쪽 셋째가 푸이의 경호를 담당했던 일본 대사관 수비대장. [사진 김명호]

1919년 4월 일본 육군성은 1907년 뤼순(旅順)에 설립한 ‘관동도독부육군부(關東都督府陸軍部)’를 개편, 관동군사령부를 출범시켰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관동군이 만주국(滿洲國) 선보이기까지 12년간, 관동군의 존재는 만철(만주철도주식회사)만 못했다. 만철 총재가 주관한 연회에서 관동군 사령관의 자리는 늘 말석이었다. 만주철도 수비가 임무이다 보니 당연했다.
  
일 관동군, 공자 후손·공친왕 아들도 저울질
 

관동군사령관에게 담뱃불 시중드는 만주국 총리 장징후이(張景惠). [사진 김명호]

러·일 전쟁 승리 후 일본은 러시아가 만주에서 누리던 특권을 독차지했다. 혁명으로 집권한 소련은 러시아와 달랐다. 중국에 추파를 던졌다. 러시아가 중국과 체결했던 불평등 조약을 폐기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가 세계를 휩쓸었다. 중국도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일본상품 배척과 요동반도의 항구도시 뤼순과 다롄(大連)의 일본 조차권(租借權)을 회수하라는 국권회복운동이 벌어졌다. 일본은 반일민족주의를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관동군의 권한을 대폭 확대했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치며 군국주의로 무장된 젊은 장교들이 관동군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일본 최대의 가상적(假想敵)은 소련이었다. 1928년, 소련이 1차 5개년 계획을 시작하자 관동군 참모부는 긴장했다.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해외 주둔군이다 보니 공감대 형성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만 국경은 일본의 최전선이다. 소련의 5개년 계획이 끝나기 전에 만주를 점령하지 않으면 영원히 소련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만주를 점령한 관동군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를 국가원수에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이유가 있었다. 푸이는 청나라 황제를 역임한 만족(滿洲族) 최고의 명망가였다. 동북지역은 만주인들의 고향이었다. 만주인을 국가원수로 내 세우면 국제사회의 비난을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푸이는 국민당 정부에 대한 반감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나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의 합작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동북의 새로운 실력자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치력이 부족했다. 자리를 보존하려면 관동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국은 5족협화(五族協和)를 상징하는 선전화부터 배포했다. [사진 김명호]

관동군은 푸이만 염두에 둔 것도 아니었다. 산둥(山東)성에서 하는 일 없이 온갖 대접을 받으며 놀고먹는 공자(孔子)의 후손과 공친왕(恭親王)의 아들도 후보에 올랐지만 푸이만 못했다. 푸이 자신도 모르는, 푸이만이 가진 무형의 자산과 관동군의 구상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관동군은 몽골(內蒙古)을 만주국에 병합시킬 구상을 했다. 청 황실은 몽골과 인연이 깊었다. 건국 초기, 황후 대부분이 몽골 여인이었다. 몽골 왕후(王侯)의 딸이라면 무조건 황후로 맞아들였다. 분수 모르고 국정에 끼어들 것은 우려했다. 중국말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멍청하기까지 하면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미추(美醜)는 가리지 않았다.
 
관동군이 만주에 수립될 새로운 국가의 원수로 푸이를 영입하려 한다는 계획을 몽골 측에 흘렸다. 효과가 있었다. 몽골 부족대표들이 공동으로 성명을 냈다. “역사상 위대한 과거가 있었던 우리 몽골족은 가혹한 정치로 피폐해진 지 오래다. 하늘과 조상들의 도움으로 기회가 왔다. 동북 민중과 일치단결해 만·몽(滿·蒙) 대지에 이상적인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만·몽 인민의 복지와 선정(善政)을 위해 선통황제(宣統皇帝)를 추대한다.”  
  
조선 총독 “선통제는 시대 부합 인물 아냐”
 

아마카스가 총무였던 친일단체 협화회(協和會)의 회의광경. [사진 김명호]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관동군에게 우호적인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조차 이런 일기를 남길 정도였다. “선통제는 이미 시대의 조류에 부합되는 인물이 아니다. 군벌만 아니면 누구를 세워도 상관없다. 새로운 인물일수록 좋다.” 해외와 국내 여론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푸이 옹립은 청 황실의 부활을 상징한다. 시대의 조류에 역행하는 관동군은 자성하기 바란다. 일본 해군도 텐진을 탈출하는 푸이에게 함정을 제공해 달라는 관동군의 요청을 거절했다.”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郞)는 텐진 총영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관동군의 위험한 발상을 우려했다. “현재 만주 주민은 한화(漢化)된 한족이 대부분이다. 선통제 옹립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다. 장차 제국의 만·몽 경영에 화근이 될까 우려된다.”
 
1931년 11월 하순, 뤼순(旅順)에 도착한 푸이는 3개월간 외부와 단절됐다. 일본인들이 만주에 선보일 새로운 국가의 형태를 결정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초조했다. 만나기로 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의 연락 오기만 기다렸다. 앞날이 궁금했다. 텐진에서 들고 온 예언서 추배도(推背圖)만 뒤적거렸다. 1932년 2월 9일, 27세 생일 다음 날 동북행정위원회가 만주에 공화국 설립을 결의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제창자가 이타가키라는 말에 속이 끓었다. 훗날 당시를 회상했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와 이타가키가 옆에 있으면 죽여버리고 싶었다. 텐진의 아름다운 정원이 그리웠다. 황제가 되지 않으면 텐진을 떠나 만주에 올 이유가 없었다. 중국을 떠나고 싶었다. 소장 중인 서화 몇 점만 매각하면, 동생들과 영국이나 프랑스에 가서 평생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동은 생각과 달랐다. 관동군에게 장문의 서신을 작성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