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7〉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는 중국 역사상 마지막 진용천자였다. 마지막이다 보니 곡절이 많았다. 1908년 겨울 3세 젖먹이 시절부터 1945년 8월 16일 40세까지 37년간, 세 차례 등극과 퇴위를 반복했다. 첫 번째 4년은 중국과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진용천자였다. 혁명으로 공화제가 실시된 후에도 푸이의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쯔진청(紫禁城) 안에서는 여전히 황제였다. 12세 때 세상 변한 줄 모르는 군벌이 베이징에 입성해 복벽(複壁)을 선언하고 청 황실을 다시 일으켰다. 황위를 되찾은 푸이는 12일 만에 군벌이 패하자 다시 퇴위했지만 쯔진청에서 완전히 쫓겨나 평민이 된 것은 1924년 가을, 19세 때였다.
잉커우 도착한 푸이, 중국인 안 나와 실망
1931년 11월 중순 텐진을 탈출, 정샤오쉬와 함께 동북의 항구도시 잉커우(營口)에 도착한 푸이는 ‘황제 폐하 만세’을 외치는 동북인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을 줄 알았다. 기대가 크다 보니 실망도 컸다. 음산한 새벽의 부두에 마중 나온 중국인은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파견한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正彦)가 인솔하는 일본인 몇 명이 다였다. 푸이의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아마카스가 나와 정샤오쉬 부자를 탕강즈(湯崗子)의 온천휴양지로 안내했다. 남만주철도(만철)가 운영하는 일본풍의 서구식 여관 2층에 몸을 풀었다. 일본군 장교와 만철 간부, 중국의 고급관료 외에는 투숙이 불가능한 최고급 여관이었다.”
푸이는 새벽잠이 없었다. 세수 마친 후 수행원을 불렀다. “산책하러 나가겠다. 아래층에 통보해라.”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아마카스에게 한 사람도 내려오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밑에 있는 사람도 올라올 수 없다.” 잠시 후 부르지도 않은 아마카스가 올라왔다. “외출을 불허한다는 이타가키 대좌의 지시를 받았다.” 이유도 설명했다. “선통황제(宣統皇帝)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도청을 당해 기분이 상했던 푸이는 황제 소리 듣자 기분이 좋았다. 더는 묻지 않았다.
“만주사변 주역 할복 기도” 소문 퍼뜨려
정샤오쉬가 황후 완룽(婉容·완용)의 근황을 물었다. “텐진에 있는 황후를 당장 동북으로 모셔와야 한다.” 아마카스는 거침이 없었다. “중국역사를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부인들이 일을 망친 경우가 허다했다.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내조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으로 이동이 결정되면 황후와 폐하의 여동생들을 폐하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키겠다.” 완룽은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오밤중에 나간 푸이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황제를 어디로 빼돌렸느냐며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다. 공사가 뒷문으로 도망칠 정도였다.
관동군이 시간을 끈 이유가 있었다. 본국의 직업외교관들이 목청을 높였다. 이탈리아 대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군인들의 정치관여를 비판하며 사직원을 제출하자 영국, 프랑스 대사 등이 동조했다. 육군상 미나미 지로(南次郞)는 이들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관동군 사령관에게 전문을 보냈다. “헤이루장(黑龍江)성에 진출한 관동군을 철수해라.” 외교관들이 잠잠해지자 아마카스가 소문을 퍼뜨렸다. “9·18 만주사변의 주역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대좌가 모든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을 기도한다.” 효과가 있었다. 대본영도 관동군을 자극하지 않았다.
사태가 진정되자 이타가키가 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뤼순(旅順)에서 만나자. 황후도 뤼순으로 이동 중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