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마르코 폴로가 열다, 마테오 리치가 꽃피우다

중앙일보

입력 2022.07.29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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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중국과 어떻게 만났나

김기협 역사학자

13세기 말에 아시아를 여행한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은 당시 유럽인에게 중국에 관한 놀라운 수준의 정보를 제공한 책이다. 흥미로운 내용 덕분에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됐으나 대부분 독자는 이 책을 재미있는 이야기책으로 여겼을 뿐, 그 내용이 사실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폴로는 원나라 치하의 중국을 ‘카타이(Cathay)’라고 불렀는데, 16세기에 유럽인의 활동이 인도양을 거쳐 중국 해역에 이를 때까지도 중국이 카타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1583년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1552~1610)가 그 가능성을 떠올리기 시작하고, 1598년경부터 인도의 고아에 있던 예수회 지역본부에 그 의견을 알렸다.
13세기 활약 폴로, ‘카타이’로 소개
원나라 때 유럽인 1000여 명 활동
 
16세기까지 300년간 교류 끊어져
리치의 예수회, 해외선교 불댕겨
 
천문·수학 등 서양문명 중국 전파
초창기엔 조상·공자 숭배도 수용
  
‘카타이(Cathay)’가 중국인가?


마테오 리치의 초상. 예수회 사제인 마테오 리치는 중국 활동 초기에 승복을 입다가 10여 년 지난 후 유삼(儒衫)으로 바꿨다. 이 그림에는 서적·천문기구·풍금 등 서양 문물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사진 위키피디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고아의 예수회사(耶蘇會士)들은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카타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리치가 알려주는 명나라와는 다른 곳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포르투갈인 수사 벤토 디 고이스를 상인으로 꾸며서 카타이를 찾아가도록 파견했다. 1602년 말 인도를 떠난 고이스는 3년 만에 감숙성 숙주(肅州)에 도착했으나 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고, 그가 보낸 편지를 북경의 리치는 근 1년 후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리치가 보낸 중국인 수사가 1607년 3월 숙주로 찾아왔을 때 고이스는 병이 위중한 상태였고 불과 며칠 후에 죽었다.
 
마르코 폴로 시대에 중국을 방문한 유럽인은 상당한 숫자였다. 원나라에 체류한 유럽인이 1000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명나라로 바뀌면서 유럽인의 발길이 끊겼다. 17세기 들어 폴로의 ‘카타이’가 중국으로 확인된 것은 이제 중국에서 유럽인의 활동이 다시 상당 수준에 이른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회사들이 북경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면 고이스의 탐험 성과도 역사에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마테오 리치가 기독교 주요 교리를 해설한 『천주실의(天主實義)』 한글본. [사진 위키피디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동방견문록』의 사실성이 오랫동안 의심받은 근본적 이유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는 데 있다. 그런데 밝혀진 오류의 대부분이 4부 중 제1부에 집중돼 있다. 중국에 도착하기까지 4년간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관찰한 내용이다. 제2부 이후에는 오류가 훨씬 적다.
  
‘희대의 허풍쟁이’ 마르코 폴로
 
이 차이는 폴로가 기록을 남긴 방법이 달라진 결과다. 17세에 베네치아를 떠난 폴로가 중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다니며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중국 도착 후 안정된 조건 속에 주체적 활동을 시작하면서 상황을 주동적으로 판단하게 됨에 따라 정확한 기록이 가능해진 것이다.
 

노년의 마르코 폴로 초상

스티븐 호는 『마르코 폴로의 중국(Marco Polo’s China)』(2006)에서 폴로가 쿠빌라이칸의 친위대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직접 증거는 없더라도 유력한 추측이다. 친위대(Keshig)는 몽골제국에서 경호실만이 아니라 비서실 기능도 겸한 기구였다. 쿠빌라이칸을 종종 알현하고 그 외교사절로 활동했다는 폴로의 서술도 많은 의심을 일으켜 온 대목이지만 이 추측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세계 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의 일본 복제판. [사진 위키피디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친위대는 ‘인질’ 제도로서 의미도 가진 것이었다. 친위대에 뽑힌 각지 유력집단의 자제들은 자기 출신세력과 중앙부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다가 때가 되면 출신지로 돌아가 지도자가 됐다. 폴로를 친위대에 뽑았다면 그의 배경이 고려됐을 것이다. 『동방견문록』 수준의 고급정보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폴로 개인의 역할에 앞서 원나라가 유럽을 잠재적 동맹 상대로 여길 만큼 당시 중-서 관계가 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콜럼버스가 1492년 항해 때 갖고 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메모가 있는 것을 보면 책 내용을 신뢰한 것 같다.

원나라 쇠퇴와 함께 중-서 관계가 멀어지면서 더 이상 중국에 관한 정보가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방견문록』의 별명 ‘일 밀리오네(Il Milione·100만)’가 ‘끝없는 [허풍]’이란 뜻으로 오랫동안 통했다. 300년 후 중국에서 예수회 활동을 통해 ‘카타이’의 정체가 확인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중-서 관계가 되살아난 결과였다.
  
마테오 리치가 예수회에 보낸 편지
 
중-서 관계를 새로 발전시킨 주역이 예수회였다. 1540년에 결성된 예수회는 종교개혁에 대응하는 가톨릭개혁의 핵심 조직이었다. 학술연구와 교육사업에 큰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항해활동의 확장에 발맞춰 해외선교에 앞장섰다. 1580년대 이후 중국에 예수회 활동이 자리 잡은 것은 예수회가 동원할 수 있던 다양한 자원 덕분이었다. 유능한 선교사들로 나타나는 인적 자원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장기간 활동비를 투입한 물적 자원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중국에서는 특히 문화적 자원이 큰 빛을 발했다.
 
예수회의 문화적 자원 중 가장 크게 빛을 본 것이 유럽에서 빠르게 발달하고 있던 천문학이었다. 마테오 리치가 1605년 본부에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마르코 폴로(맨 왼쪽 어린이) 가족이 1275년 쿠빌라이칸을 만나는 모습. 15세기 프랑스 작품이다. 폴로와 그의 아버지, 삼촌이 문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끝으로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부나 수사 한 분을 파견해 주십사는 겁니다. 기하학, 해시계, 관측기구 같은 것들은 저도 다룰 수 있고 책도 갖고 있습니다만 중국인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행성의 운동과 일월식의 계산 등 역서(曆書) 편찬에 필요한 기술입니다.”
 
리치는 학창시절 로마대학에서 당대 최고의 수학자 클라비우스에게 배운 기하학을 중국에서 지도 제작 등에 활용했고, 유클리드 수학서 번역에도 큰 공을 들였다. 중국의 제국체제에서 역법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착안해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을 들여오는 데 애쓴 것이다. 그의 청원에 따라 테렌츠(鄧玉函·1576~1630), 아담 샬(湯若望·1591~1666), 페르비스트(南懷仁·1623~1688) 등 일류 과학자 자격을 가진 선교사들이 파견돼 청나라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의 제작과 관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회의 교두보가 마련됐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원한 문화적 자원은 천문학만이 아니었다. 리치가 『서국기법(西國記法)』과 『교우론(交友論』으로 유럽의 기억술과 윤리관을 소개한 것은 유럽 문화가 존중받을 만한 수준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리치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기독교 교리를 유교의 관점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해설한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기독교와 유교가 공존한 『천주실의』
 
『천주실의』의 논지는 기독교가 유교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는 것이라는 ‘보유론(補儒論)’이었다. 다른 문화와의 공존과 포용을 추구하는 적응주의(accommodation) 노선의 적극적 표현이었다. 이슬람과의 적대관계 외에는 다른 문명권과 접촉이 없던 유럽인이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다양한 문화에 접하게 되면서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선교사업의 최전선에 나선 예수회의 신학자들이 그 필요에 따라 적응주의 노선을 세운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보유론 입장에서 현지 관습과의 갈등을 최소화했다. 조상과 공자의 숭배를 종교적 의미 없는 사회적 관습으로 규정함으로써 중국인, 특히 관원들의 입교를 쉽게 해주고 선교사 자신들도 관직을 맡을 수 있었다. 청나라 초기에서 중기까지 선교사들이 흠천감(欽天監) 등 여러 부서에 종사하며 예수회 활동의 근거를 만들었다.
 
세월이 지나 다른 교단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전례논쟁(Rites Controversy)’이 일어났다. 적응주의-보유론에 입각한 예수회의 선교 노선이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1640년대부터 시작됐다.
 
문제는 중국 현장에서 제기됐지만 교황청을 중심으로 복잡한 논쟁이 이어지다가 1715년에 보유론을 부정하는 클레멘스 11세 교황의 칙령이 나왔다. 이 논쟁에는 교황과 군주들 사이의 관계 변화가 영향을 끼쳤다. ‘교황의 근위사단’으로 불리던 예수회가 군주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1773년 해산에 이르는 과정은 영화 ‘미션’에도 나타나 있다. 예수회의 몰락은 중-서 관계의 쇠퇴를 가져와 19세기의 충돌을 더 험악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후 이 문제가 다시 제기돼 1939년 비오 12세 교황이 공자와 조상에 대한 교인들의 경배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할 때까지 계속된 상황이었다.
◆조선의 서학과 정약용
조선의 ‘서학(西學)’은 『천주실의』 등 보유론에 입각한 중국 서학서를 근거로 1770년대에 일어났지만 당시 교회는 보유론을 부정하고 있었다. 정약용의 친지 몇이 교회의 바뀐 방침을 따르다가 ‘폐제훼주(廢祭毁主)’의 죄로 처형됐다. (1791, 진산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신앙으로서 서학과 거리를 두고 실용적 목적의 서학만을 표방했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