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끝없이 이어지고, 다같이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불을 훤히 밝혔다.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빛, 골목을 비추는 가로등 빛, 현관을 밝힌 빛···. 어두운 밤 풍경이지만, 그곳은 마음이 지친 누군가를 한달음에 반겨주고 등을 도닥여줄 듯이 포근한 빛으로 가득 찼다. 정영주(52) 작가가 그린 달동네다.
지난 15년 가까이 달동네 풍경을 그려온 정 작가의 개인전 '어나더 월드(Another World)'가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27일 개막했다. 2016년 이후 처음 열리는 개인전으로,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신작 28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세로 2m에 달하는 대작부터 소품까지 단 한 점도 빠짐없이 달동네 풍경이다.
학고재갤러리, 개인전 개막
"지치고 힘들때 반겨주는 집
편안함과 온기 담고 싶었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를 졸업한 작가가 느닷없이 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무렵부터다. 그림의 영감은 그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시기에 찾아왔다. 미국에서 작업하다가 IMF 외환위기 때 한국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됐을 때였다. "어느 날 고층 건물들 사이에서 곧 허물어질 듯한 판잣집을 보았다. 고층건물과 대비되는 그 모습이 초라하고 힘든 나 자신 같았다."
친근하고 신비롭고···
그는 캔버스에 스케치한 뒤 지붕과 벽 모양으로 한지를 구긴 뒤 찢어 붙이고, 모양을 잡아가며 집을 하나씩 완성한 다음 말려서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다. 종이를 굳이 구겨서 쓰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 노화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칠하는 불빛이다. 화면에 불빛이 더해지며 어둡고 스산했던 밤 풍경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작고 초라한 집들이 서로 기대어 내일을 꿈꾸는 보금자리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정 작가는 "집 하나하나가 생명체라고 생각하며 그린다"고 말했다.
서울과 부산 변두리에서 나고 자란 작가에게 달동네는 눈에 익숙한 고향 모습이지만, 화폭에 담긴 달동네는 어떤 지역의 실제 풍경이 아니라 상상 속 세계다. 골목길을 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스케치하지만, 그가 재구성해 펼친 또 다른 세상이다. 전시 제목이 '또 다른 세계'라는 뜻의 '어나더 월드'인 이유다.
지평선 너머로 뻗어가는 빛
남루한 판잣집을 정성 들여 그리고 캔버스에 밝고 따스한 불빛을 채워가는 과정은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시간이 됐다. "처음엔 굉장히 어둡고 거칠었는데 요즘 주변으로부터 풍경이 많이 밝아졌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는 그는 "갈수록 불빛이 밖으로 나오고, 더 넓게 비추고 있다"며 웃었다.
그의 달동네 그림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는 "매번 새 캔버스를 대할 때마다 대표작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그린다"며 "아직 멀었다. 제 그림이 언젠가 추상화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달동네로 더 시도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 많다"고 했다. 전시는 8월 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