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6일 서울의 한 상급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20대 남성이 처치를 거부하며 난동을 피우고 있다. [제보 영상 캡처]
“야 이 씨XX아, 너 내가 오늘 죽인다.”
지난 3월 16일 유리에 손을 베인 20대 남성은 응급실 의료진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다. 진료를 거부하며 반말을 하는 환자에게 의료진이 “반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뒤 벌어진 일이다. 만취한 남성은 욕설을 퍼부으며 책상 위 의료기기를 던질 듯 위협했다. 응급실 보안요원은 기기를 던지지 못하게 잡고만 있을 뿐,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했다. 상의까지 풀어헤친 남성은 의료진을 향해 달려들었고, 결국 출동한 경찰이 끌고 나갔다. 그는 서너 시간 뒤 훈방 조치됐다. 이후 남성은 다시 병원에 와서 의료진을 협박했고 1시간 넘게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병원 의료진 A씨는 “한 달에도 수십번 발생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안요원들은 민원·고소 사태로 번질까 적극 대응하지 못하고 경찰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하소연했다.
응급실 난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지난 1일 응급의학과 의사(전문의 596명, 전공의 175명) 771명을 대상으로 한 ‘응급실 폭력 방지를 위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최근 1년 이내에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폭언 또는 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응답은 78.1%였다. 신변에 위협을 당했을 때 대응으로는 44.9%가 ‘참는다’고 답했다.
지난 24일 부산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60대 남성 A씨가 휘발유를 바닥에 뿌리고 불을 지른 장면. [KNN 영상 캡처]
지난달 15일 경기도 용인시의 한 병원 응급실에선 70대 남성이 응급의학과 의사의 목 부위를 낫으로 내리쳐 10㎝가량 찢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인이 심정지 상태로 이송된 후 숨진 뒤 벌어진 일이었다. 같은 달 24일 부산대병원 응급실에서는 술에 취한 60대 남성이 불을 질렀다. 응급실에 실려 온 자신의 아내를 먼저 치료해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큰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환자와 의료진 등 47명이 긴급대피했고 응급실 운영이 11시간 동안 차질을 빚었다.
의료진 폭행에 대한 경각심이 가장 높았던 건 2019년이다. 2018년 12월 말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피습으로 사망한 이듬해 ‘임세원법’으로 불리는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의료기관에서 의료인을 폭행해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상 7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중상해의 경우 3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 사망은 5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또 100병상 이상 의료기관에는 경찰과 연결된 비상벨을 설치하고 1명 이상의 보안 인력을 의무적으로 배치하도록 했다.
4일 서울 종로구 서울적십자병원에서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임 교수는 지난달 31일 평소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를 앓던 박모씨(30)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잃었다. 유족들은 고인의 생전 소명의식대로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에 분명히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2019.1.4/뉴스1
의료기관 내 폭행 사건은 매년 2200~2500건 발생하고 있다. 전국에서 하루 평균 6명 이상의 환자가 의사를 향해 달려드는 셈이다. 한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경찰이 출동해도 일반 주취자를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응급실에서 수 시간 대치하며 설득하는 것이 전부”라고 말했다. 의협이 지난 2019년 약 2000명의 회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경찰에 환자를 신고해 처벌에 이른 비율은 10% 정도였다. 신고 후 피의자나 수사기관의 요청에 따라 고소ㆍ고발을 취하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게 의협 측 설명이다.
김현 응급의학회 기획이사(연세대학교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법조ㆍ의료인력에 대한 보복성 폭력 행위 방지대책 긴급토론회’에서 “개인이 고소하면 지역사회나 병원에서 고소 취하를 종용하는 사례가 많다. 이 때문에 의료인에 대한 범죄가 벌어져도 실제로 법정으로 가는 사건이 적다”라며 “폭행이 발생했을 때 신고를 의무화해 지역 사회에서 의료진을 폭행하면 꼭 고소를 당한다는 사회적 인식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 =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이 17일 서울 용산구 대한의사협회 임시회관에서 의사대상 흉기상해사건 관련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5일 용인의 한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발생한 의사대상 흉기상해사건이 '살인 의도가 명백한 중범죄'라며 가해자에 대한 엄벌과 의료기관 내 의료인 폭행 사건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2022.6.17/뉴스1
의학계에선 “의료인 가해행위 처벌 조항을 ‘특가법(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으로 규정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전성훈 의협 법제이사)는 주장도 나온다. 또 정부 지원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이필수 의협 회장은 지난달 17일 긴급기자회견에서 “의료인 폭력사건을 막겠다고 강구한다는 대책들이 뒷문, 비상벨, 안전전담요원 등인데 오히려 이 대책들이 의료기관에 대한 규제로 돌아올 뿐 실효성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료기관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은 엄연히 공익적 영역이기에 의료인에 대한 안전과 보호를 보장하는 일 역시 공익활동이다. 정부가 전적으로 부담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응급실 내에서 의료진과 환자의 소통이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는 “응급실 내 폭력 사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다. 그러나, 환자들이 피해의식을 갖고 극단적인 행위를 벌이는 원인도 따져봐야 한다”며 “응급실 내에서 환자와 보호자에게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상 응급실에서는 의료진이 절차나 과정만을 내세우다 보니 절박한 심리의 환자나 보호자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나 보호자의 심리를 안정시킬 수 있도록 소통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스더ㆍ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