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삶의 향기] 한센인들의 큰 은인

중앙일보

입력 2022.06.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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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1980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서울 우이동 수도원 교당에서 여성 불자들 모임인 불이회 회원들과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홍라희 여사가 나에게 불이회 회원들에게 강연을 부탁한 게 계기가 됐다. 나는 ‘지혜로운 생각을 얻는 길’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그 모임에서 나는 홍 여사가 제일제당 주인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성라자로 마을 한센인들은 먹는 약이 독해서 매일 설탕물을 반드시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성라자로 마을 이경재 원장신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강연이 끝난 후 홍 여사는 그 사람들이 어디에 살고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안양에 있는 성라자로 마을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의 말을 들은 홍 여사는 당장 설탕을 한가득 실은 타이탄 트럭을 성라자로 마을로 보내주었다. 이경재 신부는 그 넉넉한 설탕을 마을에 살고 있는 한센인들뿐 아니라, 정착촌 300세대의 한센인 가정에도 넉넉히 나누어 주었다. 어느덧 43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성라자로 마을 찾아가는 삼성가
43년째 이어진 아름다운 인연
서로 건강과 행복 나누는 자리
 
홍 여사는 이듬해인 1981년 1월 9일 성라자로 마을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여 내가 동행했다. 1월 9일은 고 이건희 회장의 생일날이었다. 홍 여사는 한센인들이 1년 동안 먹을 넉넉한 설탕과 참기름·식용유·햄·과일 등 푸짐한 선물과 한센인들이 당장 먹을 따끈따끈한 찰시루떡과 만두·떡국을 끓여 먹을 육수·떡사슬을 준비했다. 그리고 108명의 한센인 개개인에게 전할 10만원 용돈이 든 봉투도 챙겼다.
 
이경재 신부는 추운 겨울인데도 밖에서 홍 여사를 기다렸다가 반갑게 맞아 환우들이 모여있는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홍 여사가 도착하자 한센인들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큰 박수로 환영했다. 정성스럽게 준비해간 선물은 한센인들 앞에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 이경재 신부는 이건희 회장 생일을 축하하고, 삼성그룹의 발전을 염원하는 말씀을 했다. 이어 홍 여사가 한센인 대표에게 용돈 선물을 전하고 스스럼없이 따뜻한 악수를 했다.
 
한센인 대표는 “이건희 회장님 생신날, 저희 한센인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은 이 회장님과 온 가족의 건강, 그리고 삼성의 큰 발전을 위해 항상 기도 드리겠습니다”라며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짧은 전달식 동안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던 홍 여사는 “지난 한 해 동안도 크고 작은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잘 헤쳐나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라고 인사말을 했고, 한센인들은 기쁨의 박수를 쳤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이 한센인들이 모여 있는 그 식당 공간에 가득 고였다.


행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마다 1월 9일에 생일잔치가 치러지고 있다. 성라자로 마을 한센인들은 1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이 회장의 생일날일 테다. 언제 어디에서 그렇게 맛있고 푸짐한 음식을 먹어보며, 어느 누구에게서 해마다 10만원의 요긴한 용돈을 받아볼 수 있겠는가. 이 회장과 삼성을 위한 일천정성의 기도가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그리고 은혜롭고 고마운 마음을 항상 머금고 살아갈 것이다.
 
생일잔치가 끝나고 나면 이경재 신부와 함께 통나무집으로 이동하여 차 한 잔을 나눴다. 이 신부는 거듭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이 회장의 안부를 물었다. 삼성을 화제로 이야기도 꺼냈다. 그리고 마을에서 만든 새해 달력과 마을에서 추수한 은행을 선물로 홍 여사에게 전했다.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본 이경재 신부는 원불교 교도인 홍 여사로부터 쉼 없는 정성과 도움을 받으면서, 종교마다 있게 마련인 그 높은 문턱이 원불교에는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긴 세월 속에, 여러 신부가 바뀌어도 그 마음과 태도는 신부님마다 한결같다.
 
이건희 회장은 매해 생일마다 홍 여사가 한센인들에게 바치는 정성을 지켜보았다. 1997년 1월 9일 생일축하 만찬에선 계열사 사장단 50여 명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졌다. ‘생일선물 사절’을 선언한 것이다. “내 생일에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 주변 사회복지시설에 선물 한 가지씩을 보내어 기쁨을 나누도록 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삼성이 연초에 계열사마다 실시하는 회장명의 지원사업은 그렇게 출발했다. 이 회장은 이제 고인이 되었어도 성라자로 마을에서 베풀어지는 생일잔치는 한결같다. 지난해와 올해에는 코로나를 조심스럽게 여긴 홍 여사가 마을을 방문하지 않고 푸짐한 생일 선물만 전달하였다. 홍 여사와 한센인의 아름다운 인연은 그렇게 43년째 이어지고 있다.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