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심장엔 1950년 11월이 불도장처럼 찍혀 있다. 6·25 당시 평북 박천까지 올라갔던 그는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경북 청도 출신의 15세가량 소년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의 유탄에 쓰러진 소년이 더는 가망이 없을 것으로 여기고 그에게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했었다. 두려움에 빠진 그는 소년의 간청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도 탈출해 살아야만 했다. 만 17세 때였다.
6·25 때 전장 나간 소년병 3만명
그들에 반세기 바쳐온 박태승씨
국가는 영영 그들을 잊을 것인가
그들에 반세기 바쳐온 박태승씨
국가는 영영 그들을 잊을 것인가
그는 1998년부터 매해 6월 호국영령을 기리는 합동위령제를 열어 왔다. 올해도 지난 21일 심우원에서 거행했다. 심우원에는 소년병 위패 3241위, 풍기·영주 전투 전사자 위패 244위, 그리고 한국전쟁 전사자 위패 3만7635위가 봉안돼 있다. 그는 여태껏 국방부·현충원을 수십 회 방문하며 정부가 누락한 소년병 870명과 6·25 전사자 3만7635위를 대전현충원에 모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박태승씨다. 군번 0350115. 1950년 8월 입대해 4년6개월간 복무했다. “나를 따라 군대에 가지 않겠느냐”는 육군본부 수색대원의 권유로 들어간 군 생활이 그의 운명을 180도 돌려놓았다. 바로 소년병의 비애다.
사실 소년병은 20여 년 전까지 까맣게 잊힌 존재였다. 국방전사에도 관련 기록이 없었다. 18세 미만은 징집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식 군번을 받고 참전했으나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병사들’이다. 2011년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에서 낸 『6·25전쟁 소년병 연구』에 따르면 한국전에 참전한 17세 이하 소년병은 2만9603명, 전사자는 2573명에 달했다.
박씨는 지난 반세기 동안 소년병 명예회복에 진력해 왔다. 하지만 국가는 아직도 응답이 없다. 2000년대 이후 관련 법안이 몇 차례 거론됐지만 구체적 결실이 없는 상태다. 그도 이제 지칠 만큼 지쳤다. 남은 소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소년병의 공적을 인정하는 번듯한 현충시설을 마련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아직 모시지 못한 6·25 전사자의 위패를 현충원에 봉안하는 것이다. 가족·후손이 없어 국가에 위패 하나 신청하지 못한 영령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충정에서다.
박씨는 “이제 아흔입니다. 얼마나 더 살겠어요.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현충일에도 꽃 한 송이 받지 못하는 그들을 잊어서야 되겠습니까.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이 맞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다행히 올해 지역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주시민 217명이 모여 그의 뜻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지난 25일 6·25 7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나라에 헌신하신 분들을 제대로 대우하는 나라를 만들겠다”(윤석열 대통령), “참전 유공자를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일류보훈을 하겠다”(한덕수 총리)고 했다. 1년 365일 중 하루의 다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내년 6·25엔 91세 소년병의 웃음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