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서소문 포럼] 윤석열식 ‘적폐수사 시스템’

중앙일보

입력 2022.06.2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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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구 정치에디터

다시 ‘검찰의 시간’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을 한 달여 앞둔 2월 7일 본지 인터뷰에서 한 공언이 현실화하고 있다. 집권 시 전(前) 정권 적폐 수사를 할 것이냐는 물음에 그는 “해야죠. 돼야죠”라고 되풀이했었다.
 
그의 단언대로 정권교체 한 달 만에 적폐 수사가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다. 칼끝은 하나같이 전 정부 권력의 최정점을 향한다. 산업부 블랙리스트 사건과 서해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은 결국 문재인 전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된다. 직전 대선후보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는 대장동·백현동 특혜 의혹과 성남FC 후원금 의혹 등 7개의 수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옥죄어 들어가고 있다.
전 정부 최정점 겨냥 전방위 수사
민주당은 실체 규명에 협조해야
여권도 원칙과 정도 지켜야 정당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기획된 정치보복’으로 규정하는 민주당의 반발은 예상대로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때의) 적폐 수사건, (현재의) 문재인 정권 수사건, 이재명 의원을 향한 수사건 모든 일의 중심에는 윤 대통령이 있다”(우상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고 의심한다. 사건 발생 후 1년 9개월 만에 성격이 180도 뒤바뀐 공무원 피살 사건을 놓고는 ‘신색깔론’ ‘신북풍’ 프레임을 씌우며 맞서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의 대응이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싶다. 자당 권력의 구심점이 얽힌 사건들이라면 실체적 진실 규명에 더욱 책임 있게 나서는 게 맞다. 특히 세월호 참사 이후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국가의 제1 책무로 여긴다던 문재인 정부로선 비로소 이름을 찾은 공무원 이대준씨 사망의 정확한 경위를 밝히는 데 최대한 협조하는 게 신념 윤리에도, 책임 윤리에도 부합한다.
 
민주당이 당면한 현실은 자업자득이기도 하다. 엉망이 된 검찰개혁 말이다.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걸 때 검찰을 개혁의 주체로 앞세워 특수부 인력을 늘리고 힘을 몰아준 게 그들이 한 일이다. 태세 전환의 계기는 조국 사태다. 그들은 ‘조국 수호=검찰 개혁’이란 등식을 만들더니 검경 수사권 조정 및 공수처 신설→검찰 내 윤석열 사단 해체→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으로 이어지는 검찰 개혁 구호를 요란하게 외쳤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자마자 ‘민주당표 검찰 개혁’은 하나둘 형해화되고 있다. 윤석열 사단은 화려하게 복귀했고 특수수사 라인이 착착 재건됐다.


윤 대통령은 정치 보복이라며 비판하는 민주당에 “정상적인 사법 시스템”이라고 반박한다. 윤 대통령의 그간 발언 등을 종합해 보면, 그가 말하는 ‘시스템에 의한 수사’는 범죄 행위 단서와 고소·고발이 있으면 형사소송법 절차대로 수사에 착수한다는 것, 민정수석실을 없애 대통령과 권력 입김을 배제한 상태에서 수사의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것, 그러나 사법부의 견제와 감시로 검찰도 통제받게 한다는 것 등인 것 같다.
 
제도화된 수사 시스템은 아니지만, 유구한 검찰 역사에 뿌리 깊게 내면화된 불문율엔 ‘평형수 본능’도 있다. 정치인 비리를 캘 때면 여당 쪽과 야당 쪽 수사 대상에 최소한의 기계적 균형을 맞추려는 속성, DNA처럼 박힌 생존 본능이다. 죽은 보수 권력의 속살을 파헤친 ‘윤석열 검찰’이 문재인 정부 시절 살아있는 권력 비리를 파고들려 할 때 제동이 걸렸다. 산업부 블랙리스트 의혹 등 현재 수사 중인 사건 상당수는 공교롭게도 전 정부 때 수사에 착수했다가 미완에 그친 것들이다. 그러니까 검찰 입장에선 기획수사 논란을 떠나 그때 결판이 났어야 할 사건들에 대한 ‘지연된 정의 구현’이라는 일종의 평형수 본능이 작동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야당이 된 민주당은 의혹의 실체를 밝히는 데 적극 협조해야겠지만, 여권도 정쟁 수단으로 삼으려 해선 곤란하다. 정치를 살아있는 생물에 비유하듯 검찰 수사도 그와 비슷해 한순간 역풍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과거 일에 몰두하는 사이 미래 국정 의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나.
 
필자가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아들 비리 등 게이트가 터질 때 출입하던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의 한 차장검사는 권력형 비리를 다루는 특수수사의 요체에 대해 “한마디로 선을 넘지 않는 것”이라고 했었다. 지나고 보니 의미심장한 말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방위 사정(司正)도 마찬가지다. 법과 원칙이라는 정도를 끝까지 지켜야만 정당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검사 출신 금태섭 전 의원이 20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도 여권이 귀담아들을 경고다. “스스로 정치보복 한다고 생각하는 집권세력은 없다. 언제나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은 뒤 적절한 선에서 멈추고 할 일을 하겠다’라면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2년 후쯤엔 다 잊어버린다. 역사는 반복되는지. 안타까운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