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앙심’ 변호사사무실 방화 7명 참사

중앙일보

입력 2022.06.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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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대구지방법원 인근의 한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서 방화로 불이 나 7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다쳤다. 경찰은 현장에서 숨진 50대 방화범이 소송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불을 지른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이날 불이 난 건물에서 시민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9일 오전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법무빌딩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방화 용의자와 변호사 사무실 직원 등 7명이 숨지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날 오전 10시55분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A빌딩(지하 1층, 지상 7층, 연면적 3903㎡) 2층 203호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150명의 진화·구조대원과 소방차량 59대가 현장에 도착해 22분 만인 오전 11시17분쯤 불을 완전히 껐다. 하지만 203호에서 변호사와 직원 등 7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빌딩 내 다른 변호사 사무실 관계자와 직원, 의뢰인 등 49명이 연기를 마시거나 열상으로 다쳤다. 이 중 31명이 인근 병원에 분산 이송됐다.
 
화재 원인은 방화로 보인다. 이날 오전 10시53분쯤 50대 용의자 B씨가 혼자 마스크를 쓰고 흰 천으로 덮은 무언가를 든 채 건물에 들어서는 모습이 폐쇄회로TV(CCTV)에 잡혔다. 경찰은 천에 덮인 물체가 인화물질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민사소송에서 패한 B씨가 인화성 물질을 뿌리고 불을 질렀을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CCTV 분석 등을 통해 방화 용의자가 손에 인화물질을 든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스프링클러 설치안돼 큰 피해 … 변호사들 ‘보복성 테러’ 충격


대구지방법원 인근의 한 변호사 사무실 빌딩에 방화로 불이 난 9일 구급대원들이 사상자를 이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망자 중엔 B씨가 포함됐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발화 지점인 203호 내 사망자들이 순식간에 일어난 불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구경찰청 형사과장을 팀장으로 한 수사전담팀이 집중 수사에 나섰다. 이날 오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소방당국이 사건 현장에서 합동감식 조사를 진행했다.
 
이날 불은 신고 후 20여 분 만에 꺼졌으나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졌다. 해당 사무실이 폐쇄 구조였고, 불이 난 건물은 준공 당시 스프링클러 의무설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 화를 키운 것으로 보인다.
 
불이 난 203호실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직원 책상과 변호사 2명 사무실, 탕비실이 나온다. 공간이 협소한 편이다. 더욱이 사무실 위치는 2층 구석이다. 계단과 반대 방향이다. 사무실과 사무실을 연결하는 복도는 폐쇄 구조다. 이 때문에 화재 후 2층을 채운 연기가 순식간에 좁은 계단·복도를 따라 위층으로 번졌고, 연기 흡입 부상자가 47명으로 확 늘었다. 건물에 갇혔던 일부 직원은 소방관들이 건넨 방독면을 쓰고 나서야 현장에서 벗어났다.
 

이날 건물에 있던 직원들이 소방관의 도움을 받아 대피하고 있다. 경찰은 CCTV 등을 분석해 50대 방화 용의자를 특정했으나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연합뉴스]

2층 다른 사무실에 근무하던 이현우(74) 변호사는 “사무실 바깥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와 비명이 들리길래 나가 보니 복도에 연기가 가득했다”며 “화재가 가장 먼저 발생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관계자가 뛰쳐나와 ‘나 혼자만 빠져나왔다’며 걱정하는 모습을 봤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2층 다른 사무실 관계자는 “상담을 하던 중 굉음과 진동이 느껴지길래 놀라서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이미 출입문 손잡이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며 “몸으로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을 때 다른 사무실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고 빠르게 대피했다”고 말했다.
 
7층인 이 건물은 일부 지하층에만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다. 정부는 2017년 화재예방·소방시설 설치 유지법 시행령을 고쳐 6층 이상 건물의 모든 층에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했다. 이 빌딩은 그 이전에 준공됐다. 현행법상 6층 미만 건물도 바닥면적이 1000㎡ 이상이면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게 돼 있다. 하지만 건축물 대장상 해당 빌딩의 바닥면적은 520~532㎡로 대상이 아니다. 소방당국은 “방화셔터 설치 대상도 아니다”고 밝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경찰은 방화 용의자인 B씨가 진행 중인 민사소송과 관련해 앙심을 품고 상대방 변호사 사무실에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구지법 등에 따르면 B씨는 2013년 대구시 수성구의 주상복합아파트 신축사업에 3억6500만원을 투자했다가 원금을 돌려받지 못하자 2019년 건설업체 대표를 상대로 투자금 반환 소송을 제기해 일부 승소했다. B씨는 지난해 4월 건설업체 대표를 상대로 8억20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추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1심에서 패소하자 항소했고, 오는 16일이 변론기일이었다. B씨가 제기한 소송의 피고 측 소송대리인이 방화사건이 발생한 사무실 변호사였다. 다만 해당 변호사는 이날 오전 경북 포항시에 출장을 가 화를 면했다. 함께 일하는 다른 변호사와 직원들이 참변을 당했다.
 
유족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을 찾은 한 중년 여성은 “사고가 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변호사의 아내”라며 울먹였다. 그는 “남편에게 아무리 전화해도 연락이 안 된다”며 “우리 남편은 넥타이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다른 여성도 장례식장 문을 열고 들어와 “사무실 직원인 남편이 사망했는지 확인하려고 왔다”고 했다. 이내 두 사람은 “어떻게 우리가 여기서 만나냐”며 손을 맞잡았다. 사망을 확인한 유족들은 “내 가족이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 모르겠다”고 울부짖었다.
 
법조계는 ‘보복성 테러’ 사건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이석화 대구시변호사협회장은 사망자 시신이 안치된 경북대병원 장례식장에 들러 “이번 사건으로 변호사들이 크게 충격을 받았다”며 “재판 패소 후 원한이 생기지 않도록 지원·상담을 해주는 제도 등을 정부와 함께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대한변협도 성명을 통해 희생자를 애도하고 “사법체계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자 야만행위”라며 재발 방지를 촉구했다.
 
대구변협 측은 이번 사건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 회장은 “방화 용의자의 재판을 담당했던 변호사와 이야기했는데, 소송에서 일부 패소한 뒤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들었다”며 “가해자도 경제적으로 어려워 피해자들이 (경제적인) 구제받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검찰의 범죄 피해자 구조제도를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