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서소문 포럼] 어이없는 대북 문해력

중앙일보

입력 2022.06.0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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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유튜브 중독이 초래한 현상 중 하나가 학생들의 문해력 저하라고 한다. 영상에만 익숙해져 문자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크게 퇴화하고 있다는 경고다. 그런데 문해력에 관한 한 학생들을 문제 삼을 게 아니다.
 
분단 한반도에서 살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어이없는 문해력 실력을 보여주는 분야가 북한이다. 그간 한국 사회에선 북한의 말과 글을 놓고 가능한 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게 뭔가 지식인답고 쿨한 것처럼 비쳤다. ‘계몽군주 김정은’이 그렇다. 북한의 인권 침해, 경제난을 비판하면 반공 논리에 사로잡힌 끝물 세대로 간주되곤 했다. 하지만 지적 허영과 전략 부재, 정치적 계산이 결합해 북한을 오역하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나중엔 북한에게서도 무시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한·미 연합훈련 양해한다던 북한
결국 훈련 철회는 “불변의 요구”
북한 의도 못 읽고 낙관한 남한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은 아닌가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 “(한·미 연합훈련이) 4월부터 예년 수준으로 진행하는 것을 이해한다. 한반도 정세가 안정기로 진입하면 한·미 훈련이 조절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018년 3월 평양에서 돌아온 대북특사단이 전한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한·미 연합훈련 실시를 이해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향후 훈련을 조절하라는 속내인가. 특사단 관계자는 당시 “김 위원장 면담에서 연합훈련 문제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이 문제가 제기될 경우 북측을 설득해야겠다고 준비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면서 이 발언을 소개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양해’는 레토릭이었고 속내는 ‘조절’이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조절’이 아니라 ‘철회’다. 지난해 9월 김 위원장이 직접 “이중적인 태도, 적대시 관점과 정책부터 먼저 철회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계속 밝히고 있는 불변한 요구”라고 밝혔다. (지난해 9월 29일 최고인민회의) 북한이 주장하는 ‘이중 기준’과 ‘적대시 정책’의 대표 사례가 한·미 연합훈련과 전략무기 반입이다. 연합훈련 중단이 불변의 요구라는 것이다. 도대체 방북단은 당시 무엇을 들었던 것인가.


# “같은 동포인 남조선 인민들에게 핵폭탄을 떨구겠다고 위협한 적은 한 번도 없다.” (2016년 2월 노동신문 논평)
 
북한이 핵을 개발하면서 내놨던 대남 프로파간다가 ‘동족은 열외’였다. 이걸 남쪽의 일부 진보단체가 받아들여 ‘남쪽과 무관한 대미용’이라는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곤 했다. 2018년 2월 조선중앙통신 논평은 메가톤급이었다. “국가 핵 무력은 민족 공동의 전략자산”이라고 주장했다. 한·미 핵공유는 들어봤지만 ‘남북 핵공유’라니 상상을 뛰어넘었다.
 
북한의 ‘민족 공유’ 선전전은 몇 년을 넘기지 못했다. 김여정 부부장이 4월 4일 “남조선이 우리와 군사적 대결을 선택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득이 우리의 핵전투무력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담화를 냈다. ‘동족에겐 안 쏜다’는 말장난은 이날로 끝났다.
 
# “일러두건대 지금 조미대화가 없고 비핵화가 날아난 것은 중재자가 없어서가 아니다. 굳이 그 이유를 남쪽 동네에서 즐겨쓰는 말대로 설명한다면 비핵화를 위한 ‘여건 조성’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비핵화라는 개소리는 집어치우는 것이 좋다.” (2020년 6월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 담화)
 
문재인 정부 시절 중재자 외교가 실패한 건 북·미 간 요구 조건이 첨예하게 다른 데도 이 차이를 무시한 채 중간에서 분위기를 조성해 성공적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거래를 성사시키려면 중재자가 쌍방의 조건과 속내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은 북·미 대화의 파국으로 끝났다. 북한은 ‘영변 비핵화’를 내놨지만, 미국은 ‘영변+α’로 처음부터 거래가 성사될 사안이 아니었다. 완전한 비핵화를 원하는 미국 입장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체재 보장을 원하는 북한 입장에서도 ‘여건 조성’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노이를 기점을 북한은 남한에 대한 태도를 확 바꿨다. 희한한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속내엔 ‘도대체 내 얘기를 제대로 듣고 전한 게 맞나’라는 답답함과 분노가 깔렸었다.
 
북한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없는 A를 요구하는데 이를 B라고 이해하곤 판타지를 꿈꾼 게 대북 문해력 난조의 원인이었다. 북핵 미사일은 항상 한반도를 겨냥하는데 ‘나를 위협하는 게 아니다’라며 화살을 미국에 돌린 게 인지력의 수준이었다.
 
어찌 보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나, 대외 정세에 대처하는 전략이나 수렴하는 지점이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읽지 않고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윤색한다 한들 현실의 엄중한 난제는 그대로라는 점이다. 윤색하면 할수록 내 머릿속 이미지는 내가 상대하는 현실과 점점 멀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