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보는 새로운 눈
이 유럽산 시대구분법을 다른 지역에도 적용하는 것이 얼마 전까지 각 지역 역사학계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유럽 자체에도 이 기준의 엄밀한 적용이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돼 왔다. 후기 중세와 초기 근대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시차가 있을 뿐 아니라 각 시대의 여러 특성이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히 바뀐 것도 아니다.
인간 사회의 변화 경로에 지역에 관계없이 일정한 법칙성이 있으리라는 추정은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역사학에서는 이 법칙성에 대한 믿음이 지나쳤다. 유럽과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많은 지역으로 역사학의 관심이 넓혀지는 데 따라 시대 구분 3분법은 규범적 법칙이 아닌 편의적 관행으로 바뀌어 왔다.
송나라 때 촘촘한 수로시설 갖춰
시장 발달하고 해상 교역도 확대
원나라 이후 왕조교체기 짧아져
정치분열에 따른 시장충격 줄어
시장은 ‘정의’보다 ‘평화’를 희망
만주 청나라도 중국에 흡입된 꼴
시장 발달하고 해상 교역도 확대
원나라 이후 왕조교체기 짧아져
정치분열에 따른 시장충격 줄어
시장은 ‘정의’보다 ‘평화’를 희망
만주 청나라도 중국에 흡입된 꼴
원-명-청 3개 왕조의 연속성
그러다 보니 그중 큰 굴곡이 서서히 떠오른다. 예를 들어 한나라 멸망에서 수나라 통일에 이르는 이른바 위-진-남북조 시대. 분열의 시대가 500년 가까이 계속된 것은 통상적 왕조 교체와 차원이 다른 변화였다. 그래서 진-한 제국과 수-당 제국 사이에 중화제국의 성격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티머시 브루크가 최근 『대국: 중국과 세계(Great State: China and the World)』에서 내놓은 시대 구분 시도도 흥미롭다. 원나라를 기점으로 중화제국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관점이다.
난세가 짧아진다는 것은 중화제국의 구심력이 커진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의 질서체계를 대표하는 왕조가 무너질 때 질서체계의 조속한 회복을 원하는 민심이 강하면 웬만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밴드왜건 효과’가 일어난다. 그런 효과가 아니라면 명나라나 청나라가 자리 잡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구심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시장경제의 발전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송나라 때 지역 간 분업이 크게 발달한 결과 정치적 분열이 경제를 해치는 정도가 달라졌다. 원나라가 쇠퇴할 때 주원장 세력을 지지한 사람들은 “어느 세력이 정의로운가?” 따지기보다 “어느 세력이 세상을 더 빨리 평온하게 만들어줄까?”를 더 많이 생각했을 것 같다.
청나라를 정복왕조라 할 수 있나
원나라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명나라는 몽골을 가장 큰 외부의 위협으로 보았다. 실제로 1449년에는 정벌군이 궤멸하면서 황제가 오히려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고, 1550년에는 몽골군이 북경 일대에 침공한 일이 있었다. 그에 비해 만주족은 명나라 멸망 50년 전까지도 명나라와 몽골세력 사이에 끼어있는 미미한 존재였다.
명나라는 민란으로 무너졌다. 1644년 3월 19일(당시 역법 기준) 북경이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에게 함락당할 때까지 청군은 오삼계(吳三桂)의 명군과 지리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청나라의 도움을 청하자 도르곤(多爾袞)의 청나라 주력군이 4월 9일 심양에서 출발해 4월 22~23일에 산해관에서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5월 2일 북경에 입성했다. 이 엄청난 진군 속도에서 당시 명나라 관-민이 청군을 적극 배척하지 않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대륙에서 해양으로 파워 이동
북중국의 장악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반면 남중국의 평정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피도 많이 흘려야 했다. 남명(南明)의 저항이 10여 년간 지속될 만큼 남방에는 저항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반감은 남북 간에 큰 차이가 없었을 텐데, 남방의 저항이 훨씬 더 끈질겼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남방 지방세력의 경제력이 눈길을 끈다. 남방의 농업생산력은 당나라 때 북방을 능가했고, 송나라 때 촘촘한 수로를 갖추면서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게다가 해로를 통한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명나라 때 막대한 양의 은(銀)이 중국으로 수입됐는데, 중국에서 은의 교환가치는 다른 지역보다 1.5배 수준이었다. 그 차익의 대부분이 남방 지방세력의 손에 들어갔다.
민란이 북중국을 휩쓸고 북경을 함락시킬 때까지 남중국에서는 질서가 지켜지고 있었다. 이 질서의 주체가 지방세력이었다. 남방 지방세력은 강한 민병대를 조직할 재력을 갖고 있었다. 반란군에게 유린당한 북방 지방세력은 청군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지만 자기 실력으로 자기 지역을 지킨 남방 지방세력에게는 청군이 ‘침략군’이었다. 3번(三藩)의 난(1676~1681)을 거쳐서야 남중국에는 청나라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원-명 교체는 오랑캐의 지배를 몰아냈다는 점에서, 명-청 교체는 다시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중시됐다. 흉노 이래 북방 유목민의 위협을 중시해 온 관행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명-청 세 개 왕조를 통해 제국의 권력구조에도 사회경제적 구조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눈에 쉽게 보이는 북방의 위협보다 남방의 경제적 변화가 중화제국에 더 큰 위협을 키워가고 있었다. 해상활동의 확장에 따라 변화의 축이 대륙에서 해양으로 옮겨진 결과였다. 해외교역의 이득을 선점한 남중국의 경제력은 원-명 교체기에도 명-청 교체기에도 큰 힘을 보여줬고, 19세기 말 청나라 쇠퇴기에도 다시 존재를 드러낸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