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트, 대리입양에 배달알바 있었다" 美 추방된 입양인 소송 [法ON]

중앙일보

입력 2022.05.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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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기 2~3명이 낯선 어른의 손을 잡고 공항으로 향합니다. 장시간 비행을 견딘 아기들이 낯선 땅에 도착하면, 별안간 처음 보는 어른들에게 인계됩니다. 과거 다른 나라로 입양 가는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겪었던 풍경인데요.
 

입양 관리 부실 책임을 물어 홀트아동복지회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 해외 입양인 신성혁 씨. [MBC 캡쳐]

 
이제 어른이 된 한 입양인이 대한민국과 홀트아동복지회를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지난 1979년 세 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입양됐다가, 지난 2016년 37여년 만에 추방된 신성혁(신송혁, 아담 크랩서)씨의 이야기입니다. 신씨의 양부모는 학대와 폭력을 일삼았고, 시민권 취득 절차를 밟지도 않았습니다. 두 차례의 파양을 겪으며 16세 때 노숙 생활에 내몰렸던 신씨는 자신에게 시민권이 없다는 사실을 성인이 돼서야 알았는데, 과거 경범죄 전력이 문제가 되면서 결국 추방됐습니다.
 
당시 해외 입양 알선 기관이었던 홀트는 신씨에게 부모가 있는데도 기아 호적(고아 호적)을 만들어 입양을 보냈습니다. 이름도 본래 이름 '신성혁'이 아닌 '신송혁'으로 기재됐습니다. 기아 호적을 만들면 비교적 간단한 절차인 '대리 입양'이 가능하기 때문인데요. 양부모가 아동을 직접 보지 않고도 대리인을 통해 입양을 진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식입니다. 이후 홀트는 신씨가 제대로 시민권을 취득했는지 등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신씨는 홀트가 입양 기관으로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하며 지난 2019년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습니다. 또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도 물었습니다. 홀트에 대한 관리 감독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점, 자국민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다하지 못한 점 등을 지적한 겁니다.


해외 입양인이 입양기관을 상대로 낸 첫 번째 소송인 이 사건은 이제 1심 막바지를 향하고 있습니다.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8부(박준민 부장판사)는 이 사건 변론 기일을 열었습니다.
 
◇"국적 취득 여부 확인 안 해" vs "확인 의무 없어"
 
이날 재판을 앞두고 홀트 측은 과거 입양아들의 국적 취득 상황이 기재된 문건을 제출했습니다. 신씨 측은 프랑스 등 유럽으로 간 입양아들은 이 문건에 국적 취득 여부가 적혀있지만, 미국으로 간 아이들의 경우 대부분 제대로 기재되지 않은 점을 지적합니다.
 
이는 미국 정부가 발급하는 입양아 비자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국적 취득 등 입양 절차가 모두 마무리돼야 부여되는 IR3 비자와 달리, IR4 비자는 미국에서 입양 절차를 마무리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IR3 비자는 양부모가 직접 입양아를 데려가야 하지만 IR4 비자는 '대리 입양'도 가능해집니다. 당시 미국 입양은 주로 IR4 비자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신씨 측은 현지에서 국적 취득 절차까지 잘 마무리됐는지 홀트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반면 홀트 측은 이걸 확인할 의무가 없었다는 입장입니다. 지난 3월 홀트 측과 정부 측 대리인은 "원고의 처지에 대한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당시 규정에 비춰볼 때 의무 위반이 인정될 수 없다"면서 "소멸시효도 완성됐다"고 밝혔습니다.  
 
신씨 측은 입양 수수료 문제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동 상품화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비용을 아예 받지 않거나 아주 최소한만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당시 홀트가 챙긴 엄청난 수수료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문제가 제기된 바 있습니다. 다만 홀트 측은 정확한 수수료 자료를 재판부에 제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씨 측은 "한 아이의 일생이 좌우될 일에 대한 자료가 없다는 변명은 이해하기 어렵고, 원고에게 전달하기 어려운 말이다"라며 각종 자료를 제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 직원이 해외로 입양될 아이들의 기록카드를 살펴보고 있다. 중앙일보

 
◇"입양아 수송 알바도 빈번"
 
이 사건에서는 당시 해외 입양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 3월, 신씨 측 증인으로 노혜련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나왔는데요. 노 교수는 1981년부터 약 17개월간 홀트의 해외 입양부에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노 교수는 "아이가 현지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학대받거나 파양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 파악하거나 개입하는 절차가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입양 부모와 입양아를 결연하는 업무에 참고할 내부 지침이나 매뉴얼이 전혀 없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면 문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기관에서는 일단 보내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노 교수는 이른바 '에스코트 서비스'에 대해서도 증언했습니다. 양부모가 한국에 직접 와 아이를 만나고 데려가는 게 아니라, 외국으로 나갈 일이 있는 사람들에게 아이 2~3명을 들려 보냈다는 겁니다. 호송하는 사람에게는 무료로 비행기 표를 줬기 때문에 주로 유학생들의 '아르바이트'로 많이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호송인이 아주 어린 아이들을 긴 비행시간 동안 돌볼 수 있는 사람인지 고려됐느냐"는 신씨 측 변호인의 질문에 노 교수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다만 홀트 측 변호인은 "신씨가 입양된 기간에는 노 교수가 홀트에서 일하지 않았고, 신씨의 입양을 담당한 것도 아니다"라는 입장입니다.
 
원래 신씨도 직접 이 법정에 나와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할 것으로 예정됐습니다. 하지만 신씨가 멕시코에 체류하게 되면서 당사자 신문 없이 1심 결론이 날 것으로 보입니다. 갑작스러운 추방으로 신씨가 아내와 자녀 등 미국에 남아있는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자, 그나마 가족과 교류할 수 있는 멕시코에 머물게 된 겁니다.
 
재판부는 오는 7월 변론 기일을 열어 양측의 주장을 한 차례 더 정리한 뒤 변론을 마무리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