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8〉
장징궈, 장야뤄 사인 조사도 안 해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아들의 앞날을 위해 군통(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국장 다이리(戴笠·대립)에게 했다는 말도 오랜 기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애들은 중국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내 친손자다. 털끝도 건드리지 마라. 애 엄마는 알아서 처리해라.”
1980년대 말, 대만과 대륙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장야뤄의 이름이 다시 오르내렸다. 기자의 방문을 받은 전 정치작전학교 교장 왕셩(王昇·왕승)이 입을 열었다. 하늘 같은 장제스와 장징궈 부자를 옹호했다. “장야뤄는 급성 이질로 사망했다. 항생제를 제때 투여하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았다.
대만으로 나온 장야뤄의 모친은 외손자 장샤오옌(章孝嚴·장효엄)과 장샤오즈(章孝慈·장효자) 형제를 엄격하게 키웠다. 외조모는 의지력이 강철 같았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머리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형제에게 부모 얘기를 해줬다. “너희들 모친은 하늘에 떠도는 구름 같은 여자였다. 부친은 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호적에 등재된 부모는 외삼촌과 외숙모다. 너희들은 장(章)씨가 아니다. 부디 성공해서 원래의 성을 되찾아(歸宗) 내 딸의 한을 풀어줘라.” 생부가 누구인지는 무덤까지 안고 갔다.
장징궈는 지독한 사람이었다. 홍콩 언론매체가 자신의 쌍둥이 사생아에 관한 기사로 도배해도 눈 한번 꿈쩍하지 않았다. 장은 매년 푸싱강(復興崗)의 정치작전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훈시하는 습관이 있었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장샤오옌이 푸싱강에서 1년간 훈련을 마치고 졸업하는 날은 참석하지 않았다.
장샤오옌은 정치와 외교에 관심이 많았다. 동생 샤오즈는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병역을 마친 형제의 미국 유학을 앞두고 왕셩이 장징궈에게 샤오옌과샤오즈의 근황을 전했다. 장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다. 책상에 머리 묻고 한동안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게 다였다.
유학을 마친 장샤오옌은 외교부에 들어갔다. 동생 샤오즈는 대학교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장샤오옌의 신분을 아는 외국 기자가 공공장소에서 부친이 누구인지 물었다. 샤오옌은 발끈했다. “국가 대사를 논하는 자리다. 사적인 질문은 피해 주기 바란다.” 보고를 받은 장징궈는 씩 웃었다.
장징궈의 3남1녀 모두 불우한 생활
1975년 4월, 총통 장제스가 세상을 떠났다. 주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장샤오옌이 대사에게 일시 귀국을 청원했다. 영문을 모르던 대사는 거절했다. 사표를 써놓고 귀국한 샤오옌이 총통의 빈소에 앉아있는 신문을 보고 짚이는 바가 있었다. 짐 정리하러 돌아온 샤오옌을 공항까지 마중 나갔다. 자세히 보니 행정원장 장징궈와 용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진땀을 흘렸다.
장징궈는 슬하에 3남 1녀를 뒀다. 장남 샤오원(孝文·효문)은 청년 시절 술집에서 여종업원에게 심한 추태를 부렸다. 신고받고 출동한 헌병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누군지 아느냐.” 만취 상태에서 난폭하게 몰던 차에 행인이 치어 죽는 사고도 일으켰다. 장징궈는 격노했다. 샤오원을 산속에 유폐시켰다. 차남 샤오우(孝武·효무)도 불우했다. 대형사고에 연루돼 대사급인 싱가포르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 삼남 샤오융(孝勇·효용)은 형들보다는 덜해도 잊을 만하면 물의를 일으켰다. 장징궈가 장야뤄를 그리며 작명한 천하절색 외동딸 샤오장(孝章·효장)은 장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미국 유학 중, 두 차례 이혼 경력이 있는 장징궈의 친구와 결혼해 실망도 시켰다.
내던져진 장샤오옌과 장샤오즈는 생부를 만족하게 했다. 외교계와 교육계에서 승승장구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