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아침이슬' 들었단 그곳…"이래서 靑 안나가려 했네" 농담도

중앙일보

입력 2022.05.10 17:28

수정 2022.05.10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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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살고 볼 일이여.” 10일 오전 11시 30분, 청와대 정문 앞에서 개방을 기다리던 한 시민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청와대 개방!”이란 사회자의 구호에 맞춰 문이 열리자 수백명의 시민들이 “와”하는 함성을 지르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74년 만인 이날 청와대가 시민 품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그래픽= 전유진 yuki@joongang.co.kr

 
1948년 정부수립 후 74년 간 12명의 역대 대통령이 이곳을 거쳐갔다. 첫 이름인 ‘경무대’가 푸른 기와집이란 뜻의 ‘청와대’로 바뀐 건 윤보선 전 대통령 때다. 고려시대 왕궁 터, 조선시대 경복궁 후원으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총독관사가 지어지며 지금의 부지를 형성했다. 그간 대통령 경호상 문제로 일반인에게는 행사 때만 일부 개방됐는데, 10일 취임한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이날부터 전면 개방됐다.
 
경내 개방에 앞서 이날 오전 6시50분 춘추문을 통해 청와대 남측면으로 북악산에 오르는 등산로가 먼저 개방됐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숙정문을 통과하는 청와대 뒤 성곽길을 개방했지만 춘추문에서 곧장 이어진 등산로가 열린 건 처음이다. 이준자(56)씨는 “가고 싶어도 못 가던 길인데 1번으로 가게 돼 들뜬다”고 말했다.
 

백악정 뒷길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 성지원 기자

등산로는 잘 닦인 아스팔트 길이었다. 삼청동 주민 장주희(71)씨는 “노 전 대통령이 개방한 뒷길로 다닐 땐 솔가지가 쌓인 길을 사박사박 걸었다”며 “그 길은 계단이 너무 많아 힘들었는데 이 길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성곽을 따라 뾰족한 철조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20분쯤 걷자 작은 정자인 백악정이 나타났다. 정자 오른쪽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심은 느티나무가, 왼쪽에는 노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가 심은 서어나무가 서있었다. 박수현 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8일 SNS에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 나무를 두고 ‘노 전 대통령이 두 나무가 조화될 수 있게 느티나무가 아닌 서어나무를 심었다’고 했다고 썼다.


백악정을 지나자 좌측으로 청와대 전경이 펼쳐졌다. 모습을 드러낸 관저를 보고 “저기 관저 보인다”며 탄성을 지르는 시민들도 있었다. 특히 경복궁 너머로 시청까지 이어지는 광화문 광장 일대가 또렷이 보였다. 새로 개방된 길을 돌아 춘추문으로 돌아오는 데 1시간이 채 안 걸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참모들을 데리고 이 길을 자주 오르며 단합대회를 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의결된 후인 2004년 4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이 길을 찾아 자신의 처지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ㆍ봄이 왔지만 봄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했다.

노무현대통령이 2006년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가진 북악산 산행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날 등산길에 취임 3주년을 맞은 소회와 남은 2년 동안의 국정운영 방향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청와대 정문은 11시37분에 개방됐다. 학생 등 미리 선정된 국민대표 74인이 봄을 알리는 매화를 들고 먼저 입장했다. 이날 학생들을 데리고 청와대를 찾은 장영희(54) 매동초 교장은 “청와대가 시민들 품으로 돌아와 감격스럽다. 아이들과 녹지원에서 수건돌리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문이 열리자 푸른 기와의 본관이 가장 먼저 보였다. 1991년 완공된 본관은 역대 대통령이 주로 주 집무실로 쓰던 공간이다. 내부 입장이 막혀 시민들은 유리문 너머로 레드카펫을 구경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 후 본관에 도착해 “기수(김기수 수행실장)야, 사무실에 우째 가노?”라고 물었다고 한다. 출입문에서 15m를 걸어야 책상에 앉을 수 있는 집무실 크기에 압도당했다는 일화다.
 

정문에서 바라본 청와대 본관. 성지원 기자

본관에서 대통령 침실이 있는 관저까지 도보로 9분 정도가 걸렸다. 크게 세 건물로 나뉜 관저의 대문인 인수문을 들어서니 낮은 소나무 몇 그루와 꽃나무를 심은 마당이 드러났다. 포항에서 온 구희숙(58)씨는 “마당이 너무 좋다. 이 좋은 공간을 혼자 누렸다. 이래서 안 나가려 했구나”라며 웃었다.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은 2016년 국회 청문회에서 주로 관저에서 시간을 보냈던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서면 보고서를 낼 때 “(비서동에서)자전거를 타거나 뛰어가서 전달했다”고 말했다. 한 시민은 “이렇게 돌아가니까 보고가 빨리 안 되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  
 

청와대 대통령 관저로 들어가는 입구인 인수문으로 10일 시민들이 들어가고 있다. 성지원 기자

관저 뒤 산책로를 따라 산을 오르니 경복궁 후원에 있는 오운각의 이름을 딴 정자 ‘오운정’이 나타났다. 좀더 걸으니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이 쭉 보이는 산책길이 나왔다. 이 전 대통령이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대를 바라 본 장소가 이곳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광화문 일대가 촛불로 밝혀졌던 그 밤에, 저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았다. 시위대의 함성과 함께 제가 오래전부터 즐겨 부르던 '아침이슬'이라는 노래 소리도 들려왔다”고 했다. 이날 시내는 조용했지만 인파가 모이면 이곳까지 함성이 들릴 듯했다. 한정식집을 하는 김정식(69)씨는 “구중궁궐같던 청와대를 맘껏 둘러봐 설렌다”고 했다. 산책로를 더 걷자 통일신라 시대 불상으로 2018년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미남불)이 보였다.
 

청와대 대통령 관저 뒷길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광화문 광장.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광우병 촛불시위를 바라봤다고 한다. 성지원 기자

관저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자 외빈 접견에 사용되는 상춘재가 나타났다. 문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 상춘재 앞뜰에서 여야 당 대표 오찬을 여러 차례 열었는데, 직접 테이블을 옮기기도 했다. 상춘재 앞으로는 녹지원이 펼쳐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이곳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조깅을 했다. 조깅의 주제는 “민주주의를 위한 조깅”. 두 정상은 녹지원을 총 9바퀴 돌았다고 한다.
 
녹지원을 지나 남서쪽으로 걸으니 참모들의 업무동인 여민관이 보였다. 여민관은 1~3관으로 이뤄져 있는데, 통상 본관 집무실을 이용한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문 전 대통령은 참모와 소통을 강화하겠다며 취임 후 여민1관 집무실을 주 집무실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3월 당시 김은혜 윤석열 당선인 대변인이 “비서동에서 대통령 집무실까지 올라가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하자 탁현민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뛰어가면 30초, 걸어가면 57초”라고 반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청와대 여민관. 성지원 기자

 
청와대 경내를 한 바퀴 도는 데는 넉넉잡아 1시 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외빈을 맞는 영빈관을 지나 다시 정문으로 돌아왔다. 문 전 대통령은 9일 오후 이 길을 걸어서 퇴근했다. 청와대 정문으로 퇴근한 마지막 대통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