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조심해도 브로커가 작정하고 속이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판매한 물건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갈지 일일이 어떻게 추적합니까."
대북 제재 위반 행위에 의도치 않게 얽혔던 한국 업계 관계자들은 한 목소리로 억울함을 토로한다. 제재를 피해가는 북한의 수법은 날로 진화하고, 미국과 국제사회도 감시망을 좁히는 가운데 무고한 한국 기업에 불똥이 튈 우려도 커지고 있다.
SK 불똥 튄 유류 제재
이와 관련 미국의소리(VOA)는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보도에서 "(거래 시)목적지가 '공해상'으로 표기되는 등 의심할 만한 정황이 있었다"며 "SK에너지가 보다 신중하게 살폈어야 한다"는 전문가 지적을 전했다.
그러나 업계와 외교가의 의견은 좀 다르다. "제재에 저촉될까봐 모든 공해 상 거래를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대량으로 거래되고 혼합할 수도 있는 유류의 특성 상 이미 판매한 제품의 최종 목적지를 추적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엔 전문가패널 또한 '문제의 유류'를 판매한 주체가 SK에너지라고 명시된 서류를 보고서에 첨부했을 뿐 따로 제재를 위반했다는 지적은 하지 않은 채 SK에너지가 관련해 협력하고 있다고만 적었다.
SK에너지 측은 4일 중앙일보에 "모든 거래 시 대북 제재 위반 여부를 사전에 확인하고 있다"며 "향후 유엔ㆍ미국ㆍ유럽연합(EU)의 대북 제재 관련 권고 사항을 엄격히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외교부도 같은 날 "SK에너지가 제3국 회사에 판매한 정유 제품이 해상 환적을 거쳐 북한에 이전된 것으로 추정되며, SK에너지는 그 과정에서 적절한 주의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대다수 제재 "몰랐어도 문제"
문제는 대북 제재는 '북한과 잘못 얽혔다가는 미리 알았든 몰랐든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토대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대북 독자 제재나 유엔 안보리 제재 상당수는 '주의 의무(Due diligence)'를 규정하고 있다. 의도치 않게 북한과 연루되더라도 처벌 받을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라는 뜻이다. 결국 '무지도 죄며, 몰랐다고 면죄부를 주진 않는다'는 경고다.
이는 철저한 제재 이행을 위한 불가피한 장치지만, 예기치 않은 피해를 초래하기도 한다. 지난해 6월엔 한국 선사가 소유했던 유조선 두 척이 2019~2020년 중국 브로커를 거쳐 북한으로 반입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북한에 신규 혹은 중고 선박을 이전하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당시 선사 측은 "중국 측에 판 배가 북한으로 갈 줄은 몰랐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조사 결과 해당 기업의 제재 위반 소지는 없는 것으로 결론 났지만, 중소 선사로서는 조마조마하며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2018년 8월 북한산 석탄 불법 반입 논란 때도 증권가 정보지를 통해 '미국이 국내 은행에 세컨더리 보이콧(북한과 거래한 제3의 기관ㆍ개인 제재)을 가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청와대와 금융 당국은 "사실 무근"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진위 여부에 관계 없이 주식 시장이 출렁였다.
기업 계도ㆍ유엔 소통 중요
이처럼 갈수록 북한의 제재 회피 수법은 진화하고 미국은 동맹ㆍ우방 가릴 것 없이 대북 제재 이행의 고삐를 죄는 만큼 국내 업계에 대한 정부의 보다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계도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다. 외교부, 해양수산부 등 유관 부처가 공조해 국산 선박, 유류 등에 대한 추적 시스템을 강화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한국 기업이 제재 위반 의혹을 받을 경우 국제사회에 입장을 충분히 소명하고 관련 자료를 충실히 제출할 수 있도록 중재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앞서 정부는 2018년 북한산 석탄 반입 논란 때 관련 첩보를 10개월 전 이미 확보하고도 선박 억류 등 필요한 조치를 제때 취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사전에 미국과 긴밀히 소통해서 이중용도 물자에 대한 수출 통제 및 금융 제재의 근거를 명확하게 파악해둬야 한다"며 "특히 금융 제재의 경우 한국과 제도 자체가 다른 부분이 있어서 보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업계를 대상으로 계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