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5〉
장징궈, 소련 유학 때 현지 여성과 결혼
장징궈는 왕셩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파라과이 대사로 내보냈다. “한동안 귀국할 생각 접어라. 너의 안전을 위해서다. 해외 공관장 회의도 참석할 필요 없다. 내가 죽어도 자리를 지켜라.” 왕셩은 장의 최측근이었다. 초청자 없는 잔칫집에 갔다가 남이 흘린 돈지갑 챙기듯이 집권한 통치자라면 모를까, 최고 권력자의 측근은 수시로 바뀌는 것이 정상이다. 장은 왕을 끌어내린 후에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란, 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대륙 시절, 장은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소련에서 결혼한, 점잖고 약점 없는 소련인 부인 몰래, 3년간 동거한 중국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부친과 세상 눈치 보느라 돌보지 않은 두 아들이 번듯하게 성장하기까지는 왕의 지극한 정성이 절대적이었다. 얘기는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는 15세 때 소련유학을 떠났다. 장제스가 공산당과 결별하자 이국에서 온갖 신산 감내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군사정변 일으켜 공산당원 도살하고,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홀려 자신의 생모와 이혼한 부친을 쓰레기 취급했다. 전쟁터에서 만나면 적으로 대하겠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합작을 선언하자 스탈린은 장징궈를 귀국시켰다. 12년 만에 중국으로 돌아온 장징궈는 국민당원도 아니고, 황푸군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삼청단 단원도 아니었다. 국민당 조직을 장악한 천커푸(陳果夫·진과부), 천리푸(陳立夫·진립부) 형제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호적상으로 인척이 된, 금융계와 재계를 쥐락펴락하던 부친의 동서와 처남들도 남 보듯 했다.
장, 장시성 간부훈련반 이혼녀에 반해
소련 시절 장징궈는 스탈린의 영향을 받았다. “간부의 역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의 한마디가 일찌감치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간부양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전 작업을 위해 전시수도 충칭(重慶)으로 갔다. ‘국민당 중앙훈련원 당정반(黨政班)’에 입소했다. 3개월간 교육받고 취득한 국민당 당원과 삼청단 단원 자격증 들고 장시성으로 돌아왔다. 장시성 남부 간저우(竷州)의 치주링(赤珠嶺)에 ‘삼민주의청년단 장시성지부 간부훈련반’ 간판을 내걸었다.
간부훈련반 주임 장징궈는 소련에서 배운 군중 운동과 중국 비밀결사의 전통적인 운영방식을 적절히 혼용했다. 장시성은 의무교육을 제일 먼저 시작한 성이었다. 경제력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다. 고등교육 이수한, 우수한 청년 남녀들이 간부훈련반의 문을 기웃거렸다. 장은 200대 1의 경쟁을 뚫은 청년들에게 강조했다. “단장(장제스)에게 충성해라. 오늘부터 너희들은 단장의 귀와 눈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형제 이상으로 단결하고 환난을 함께해라.” 호칭도 남녀 할 것 없이 형과 동생으로 통일시켰다. 5기까지 배출한 500명은 훗날 장징궈의 ‘직계 중의 직계’로 성장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왕셩이었다. 간부훈련반 외에도 비슷한 조직을 여러 개 출범시켰다.
인간 세상엔 예외가 있는 법, 간부훈련반에 장징궈의 눈을 화려하게 만든 이혼녀가 있었다. 개방적인 성격에 노래 잘하고 붓글씨도 일품이었다. 훈련반 마치면 장시성의 군과 기관에 파견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장이 부관에게 지시했다. “난창(南昌) 출신 장야뤄(章亞若·장아약)를 비서실에 배치해라.” 고지식한 부관이 토를 달았다. “규정에 어긋난다.” 장징궈는 한마디로 묵살했다. “깨라고 있는 것이 규정이다.” 장제스 집안의 족보가 복잡해질 징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