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총애 받던 참모총장, 장징궈 최측근 군복 벗겨

중앙일보

입력 2022.04.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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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5〉

장제스는 검소하고 나대지 않는 소련 며느리를 총애했다.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중국 이름을 지어줬다. 장징궈와 친했던 CIA 부국장 크라인은 장팡량을 금세기 최고의 퍼스트 레이디라고 극찬했다. [사진 김명호]

미·중 수교 후, 대륙의 중공정권은 자신이 넘쳤다. 대만을 향해 연일 평화 공세를 날렸다. 대만의 국민당 반대세력은 대륙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에 취했다. 조심스럽게 기지개 켜며 몸을 풀었다. 계엄령 해제와 야당 창당, 민주화가 목표였다. 총통 장징궈(蔣經國·장경국)는 결자해지(結者解之), 민주화를 제 손으로 추진하고 싶었다. 중공의 평화 공세에 맞설 기구 창설과 운영을 정치작전학교 교장 왕셩(王昇·왕승)에게 일임했다. 왕이 설립한 ‘류샤오캉(劉少康)판공실’은 그림자 내각이었다.
  
장징궈, 소련 유학 때 현지 여성과 결혼
 

기갑사단을 시찰하는 참모총장 하오보춘. [사진 김명호]

참모총장 하오보춘(郝栢村·학백촌)은 전임 총통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호위무사였다. 계급도 2급 상장인 왕셩보다 높은 1급 상장이었다. 장제스 생전에 총애를 독차지하던 맹장 하오도 왕과 마주하면 기가 죽었다. 왕에게 거수경례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하오는 장징궈가 ‘류샤오캉판공실’을 해체하자 행동에 나섰다. 사실에 근거한, 품위 있는 모함으로 왕의 군복을 벗겼다.
 
장징궈는 왕셩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파라과이 대사로 내보냈다. “한동안 귀국할 생각 접어라. 너의 안전을 위해서다. 해외 공관장 회의도 참석할 필요 없다. 내가 죽어도 자리를 지켜라.” 왕셩은 장의 최측근이었다. 초청자 없는 잔칫집에 갔다가 남이 흘린 돈지갑 챙기듯이 집권한 통치자라면 모를까, 최고 권력자의 측근은 수시로 바뀌는 것이 정상이다. 장은 왕을 끌어내린 후에도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몇 권의 책으로도 모자란, 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대륙 시절, 장은 남에게 털어놓지 못할 사연이 있었다. 소련에서 결혼한, 점잖고 약점 없는 소련인 부인 몰래, 3년간 동거한 중국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부친과 세상 눈치 보느라 돌보지 않은 두 아들이 번듯하게 성장하기까지는 왕의 지극한 정성이 절대적이었다. 얘기는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외숙모의 손에서 성장하며 부모가 누군지도 몰랐던 장징궈의 쌍둥이 사생아(私生兒). [사진 김명호]

장제스 권력의 원천은 황푸(黄埔)군관학교와 삼청단(三民主義靑年團)이었다. 황푸 출신들에게 장은 영원한 교장이었다. 국민당 군의 정식명칭인 국민혁명군의 중요 지휘관과 삼청단의 핵심에 포진한 황푸 졸업생들은 장을 위원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교장이라고 불렀다. 대륙 시절은 물론, 대만으로 나온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총통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는 15세 때 소련유학을 떠났다. 장제스가 공산당과 결별하자 이국에서 온갖 신산 감내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군사정변 일으켜 공산당원 도살하고,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홀려 자신의 생모와 이혼한 부친을 쓰레기 취급했다. 전쟁터에서 만나면 적으로 대하겠다는 성명까지 발표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본과의 전쟁을 위해 합작을 선언하자 스탈린은 장징궈를 귀국시켰다. 12년 만에 중국으로 돌아온 장징궈는 국민당원도 아니고, 황푸군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삼청단 단원도 아니었다. 국민당 조직을 장악한 천커푸(陳果夫·진과부), 천리푸(陳立夫·진립부) 형제와도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호적상으로 인척이 된, 금융계와 재계를 쥐락펴락하던 부친의 동서와 처남들도 남 보듯 했다.
  
장, 장시성 간부훈련반 이혼녀에 반해
 

정치작전학교 교장 시절의 왕셩. [사진 김명호]

장징궈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자력으로 구축했다. 1937년 봄, 28세 때 소련인 부인과 아들 데리고 장시(江西)성에 첫발을 디뎠다. 성 주석은 머리가 잘 돌아갔다. 장을 실습 나온 태자처럼 모셨다. 자신이 처장을 겸하던 성 보안처 부처장과 정치강습학원 원장직을 안겨줬다. 보안처 부처장은 육군 소장이 가는 자리였다. 장시성은 전쟁의 참화가 다른 성에 비해 덜했다. 각지에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정치강습학원이 피난 온 청년들의 안식처로 변했다. 규모가 커지자 정치강습학원을 청년복무단으로 개편했다. 신병 징집과 훈련을 위한 부대 신설 계획안도 제출과 동시에 허락이 떨어졌다.
 
소련 시절 장징궈는 스탈린의 영향을 받았다. “간부의 역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의 한마디가 일찌감치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간부양성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전 작업을 위해 전시수도 충칭(重慶)으로 갔다. ‘국민당 중앙훈련원 당정반(黨政班)’에 입소했다. 3개월간 교육받고 취득한 국민당 당원과 삼청단 단원 자격증 들고 장시성으로 돌아왔다. 장시성 남부 간저우(竷州)의 치주링(赤珠嶺)에 ‘삼민주의청년단 장시성지부 간부훈련반’ 간판을 내걸었다.
 
간부훈련반 주임 장징궈는 소련에서 배운 군중 운동과 중국 비밀결사의 전통적인 운영방식을 적절히 혼용했다. 장시성은 의무교육을 제일 먼저 시작한 성이었다. 경제력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다. 고등교육 이수한, 우수한 청년 남녀들이 간부훈련반의 문을 기웃거렸다. 장은 200대 1의 경쟁을 뚫은 청년들에게 강조했다. “단장(장제스)에게 충성해라. 오늘부터 너희들은 단장의 귀와 눈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형제 이상으로 단결하고 환난을 함께해라.” 호칭도 남녀 할 것 없이 형과 동생으로 통일시켰다. 5기까지 배출한 500명은 훗날 장징궈의 ‘직계 중의 직계’로 성장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왕셩이었다. 간부훈련반 외에도 비슷한 조직을 여러 개 출범시켰다.
 
인간 세상엔 예외가 있는 법, 간부훈련반에 장징궈의 눈을 화려하게 만든 이혼녀가 있었다. 개방적인 성격에 노래 잘하고 붓글씨도 일품이었다. 훈련반 마치면 장시성의 군과 기관에 파견하는 것이 규정이었다. 장이 부관에게 지시했다. “난창(南昌) 출신 장야뤄(章亞若·장아약)를 비서실에 배치해라.” 고지식한 부관이 토를 달았다. “규정에 어긋난다.” 장징궈는 한마디로 묵살했다. “깨라고 있는 것이 규정이다.” 장제스 집안의 족보가 복잡해질 징조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