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이 뜨는 이유
가혹한 폭군 이미지 점차 사라져
거대 중국 처음 건설한 영웅 대접
문화혁명서도 살아 남은 병마용
중국 공산당의 통제논리 뒷받침
법률·화폐·도량형 통일한 진시황
‘21세기판 만리장성’ 건설에 이용
거대 중국 처음 건설한 영웅 대접
문화혁명서도 살아 남은 병마용
중국 공산당의 통제논리 뒷받침
법률·화폐·도량형 통일한 진시황
‘21세기판 만리장성’ 건설에 이용
‘고고학자들은 인민의 적’ 비판
1966~1976년에 진행된 문화혁명은 ‘문화파괴’에 가까웠다. 이 시기에 발견된 문화재 대부분은 참혹한 피해를 보았다. 정상적인 발굴은커녕 멀쩡한 국보급 문화재도 홍위병들에 의해 무참히 훼손됐다. 심지어 황제 시신마저 부관참시(剖棺斬屍)된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예컨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에 명군을 파견했던 만력제(萬曆帝·1563~1620)의 무덤인 정릉(定陵)은 1955년에 발굴됐고, 만력제와 그의 황후들의 시신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홍위병들은 지주계급의 우두머리를 타도한다면서 만력제와 황후의 시신을 보물들과 함께 불태워 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수많은 문화재가 사라졌고 고고학자들도 인민의 적이라는 엄청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파괴를 저지른 홍위병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 무법의 시절이었다.
현지 고고학자들이 자칫 큰 고초를 겪을 상황이었지만, 예상 밖으로 당시 중국 정부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공교롭게도 마오쩌둥(毛澤東)이 바로 그 직전에 공자를 비판하고 진시황을 찬양하는 글을 썼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의 실세이자 문화혁명을 주도한 마오쩌둥은 린뱌오(林彪)와 같은 기존 공산당의 지도 세력을 공자에 빗대어 구세력으로 몰고 탄압했다. 마오쩌둥과 문화혁명 4인방은 기존의 모든 것을 갈아엎고 개혁하는 상황이었으니 파괴의 아이콘인 진시황이 정책 홍보에 안성맞춤이었다.
의도야 어땠든 마오쩌둥의 글 한 줄 덕에 세계를 놀라게 한 병마용의 본격적인 발굴이 가능했다. 사실 이 지역에서 병마용의 존재는 그 이전부터 알려져 왔다. 하지만 대부분 우연한 발견으로 치부됐다. 실제로 병마용은 진시황의 무덤에서 1.6㎞나 떨어져 있었으니 진시황과 병마용을 쉽게 관련짓지 못했다. 정부의 전폭적 지원으로 대대적인 발굴을 한 후에야 진시황과의 관련성이 밝혀졌다. 문화혁명의 파괴가 낳은 유일한 성과가 진시황의 유물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생전에도 도굴 두려워한 진시황
진시황이 통합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강력한 통제였다.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통일국가를 만들어낸 그는 모든 것을 통일시키기 위해 강력한 법률을 도입했다. 병마용이 발견될 무렵 후베이성(湖北省)의 수이후디(睡虎地)라는 지역에서 진나라의 하급 관리의 무덤도 발견됐다. 원래 초나라였던 이 지역에 파견된 진의 관리는 얼마나 엄격한 법률을 지켰는지, 그의 무덤 속에는 평생 그가 일하던 진나라의 법률과 행정문서를 적은 목간들이 빼곡히 발견됐다. 얼마나 진나라가 법을 엄히 다스리고 지켰는지 짐작이 된다. 진시황은 군사 50명을 움직이는 것도 반드시 황제의 허가를 받도록 할 만큼 중앙집권화했고, 도량과 화폐의 규격화를 통해 각 지역을 연결했다. 물론 각 지역의 반발은 강력히 억눌렀다.
실제로 사마천의 『사기』에는 정작 병마용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병마용은 지금까지 확인된 발굴 면적만 축구장 3개 넓이인 2만㎡가 넘으니 전체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렇게 진시황의 무덤보다 더 거대한 규모를 만약 사마천이 알았다면 반드시 기록에 남겼을 것이다. 아마도 위대한 역사가인 사마천마저도 전혀 모를 정도로 진시황의 무덤 조성은 극비로 진행된 작업인 모양이다.
그러한 비밀스러운 작업은 진시황이 자신의 무덤이 도굴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에서 가장 큰 무덤을 썼던 오랜 선조 진경공(秦景公)의 무덤은 도굴갱이 250개나 될 정도로 무자비하게 도굴됐다. 진시황은 이런 사정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무덤 내부 구조 등을 후세에 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대신에 수많은 이야기를 퍼뜨려 도굴을 막고, 정작 본인은 자신의 영생을 위해 비밀리에 병마용과 같은 대형공사를 했다.
화려한 권력자, 나약한 인간
발굴과정이야 어떻든 병마용은 만리장성과 함께 다시 성장하는 중국의 상징이 됐다. 1980년대 이후에 남북한 정상은 물론 중국을 찾는 수많은 해외 수뇌들이 병마용을 찾았다. 지금도 많은 국가에서 고대사의 인물을 꺼내어 재해석하며 그를 현재의 모습에 대입하려 한다. 중국에서 진시황이라는 인물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문화혁명이라는 소용돌이에서 탄생한 병마용은 지금 거대한 중국의 상징이 됐고, 21세기 중국은 진시황이 만든 거대한 제국에 현재의 모습을 투영한다. 구글·페이스북 등 수많은 외국의 프로그램에는 장벽을 쌓고 자신들만의 디지털 만리장성을 쌓고 있다. 또한 강력한 왕권으로 자신들의 규격을 사방의 여러 나라에 도입시키려는 노력은 바로 진시황이 살아가던 모습이다. 하지만 고고학은 그러한 화려한 모습 뒤에 숨겨진 나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진시황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