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송호근의 세사필담] 유배형에서 살아온 사람은 겁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2022.04.19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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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한국에서 피의자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이다. 누군가 앙심을 품고 고소하면 된다. 고소공화국 한국에는 사전 중재절차가 없다. 일본은 소액 사기·횡령, 경미한 모욕사건은 변호사 상담 및 중재를 통해 해결한다. 급이 안되는 사건은 아예 사법기관에 접수조차 안 된다. 인구 1억2600만 일본에서 형사고소건이 한국의 5% 정도, 피의자는 2%에 그치는 이유다. 2021년 한국엔 형사사건 83만건, 민사사건 36만건, 총 119만 건이 발생했다. 처벌받아 마땅한 범죄와 음해·무고성 복수극이 섞였다. 징벌과 한풀이에 경찰과 사법기관이 동원된다.
 
국력과 인력 낭비다. 강력범죄와 부정부패라면 모르겠거니와, 명예훼손·모욕죄 같은 경한 범죄도 수사결과에 불복해 이의신청을 하면 최종 판결까지 하세월이다. 형사에서 승소하면 대부분 민사로 간다. 한국인은 ‘끝장을 본다’. 고소인이 될 권리는 극대, 피의자가 안 될 권리는 극소다. 정당한 고소인도, 음해성 피의자도 구제받으려면 긴 터널을 지나야 한다. 이런 사법 현실에서 조속하고 공정한 수사는 절대적이다.
고소·고발 강행하는 고소공화국
검수완박 성채 안에 서민은 없어
설령 합헌이라도 나쁜 법인데
3개월 유예? 역량과 여건 갖춰야
 
정권이 출범하기도 전에 시대적 과제를 집어삼킨 ‘검수완박’. 누구를 위해 이토록 요란한가? 날 저문 권력자들을 위한 철갑 수비에 국민의 궁핍한 사법 현실은 안중에 없다. 검찰을 ‘서류검토청’으로 만든 이 법안이 정국을 기어이 두동강 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 신체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타종이라면 기꺼이 환영피켓을 들겠는데, 위정자들 사후보장이라는 불순한 의도가 걸린다. 권력남용에 뒤끝이 개운치 않은 탓일까. 아무튼 대통령의 감옥행은 이제 사절이다. 760조원 국가부채를 거덜 낸 자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고 싶지만 건실한 민주주의를 위해 참아야 한다. 5·16 군사정권 이후 비대해진 검찰권력도 축소 조정이 필요하다. 작년 초 수사권은 대거 경찰로 넘어갔는데, 중대, 특수, 금융, 정치범죄까지도 경찰에 넘겨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도를 넘었다. 검찰개혁이란 근사한 명분이 결국 이런 것이었나.
 
경찰청장을 비롯해 경찰고위직은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권력이 넝쿨 째 들어 오는데 반갑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경찰 노조격인 경찰직장협의회가 대리기사로 나섰다. 경찰이 사건의 99.2%를 너끈히 감당했기에 최상급 ‘6대 범죄’까지도 해낼 수사역량을 키웠다고 말이다. ‘경찰을 비하하지 말라.’ 멋진 말인데 사법경찰관들의 곡소리가 나온다. 법조계 판단으론 역량과 여건을 갖추는데 수 년이 걸린단다. 게다가 일선 수사관은 인기 보직이 아니다.
 
헌법 위반인가? 법조계 의견도 첨예하게 갈린다. 헌법 ‘12조 3항’과 ‘89조 16호’가 근거다. 강제수사권을 규정한 12조 3항은 ‘체포·구속·압수수색을 할 때에는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고 했다. 검찰이 수사의 주체임을 명시한 것이다. 헌법 조문에 경찰에 대한 별도 규정은 없다. 89조 16호, 대한민국 국무회의의 임명대상에서 경찰청장은 아예 빠졌다. 그러니 경찰과 경찰청장을 명시한 헌법개정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헌법 최고기관인 헌재의 입장은 다르다. 강제수사권이 검찰의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즉 12조 3항이 다른 기관의 수사권 행사까지를 틀어막은 것은 아니다. 공수처 신설의 합법 근거이자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광범위하게 해석한 결과다. 그런데 검찰의 무장해제, 검찰을 서류검토청으로 만든다면 얘기는 사뭇 달라질 것이다. 헌재도 사태가 여기까지 치달을 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변 출신 어떤 변호사는 공분을 감추지 못했다. 검수완박은 마치 국회를 입법, 예산, 감찰 국회로 쪼개는 것처럼 헌법 파괴라고 했다. 헌재도 예상치 못한,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나쁜 법! 불법을 은폐하는 법! 판사 경력의 법학교수는 민주당이 제정신인지를 반문했다. 검찰을 통제하는 제도가 지금도 있다고 했다. 재정(裁定)신청, 공소 유지 변호사제도, 대배심과 수사심의위 등. 이런 제도를 용도폐기하고 수사권을 완전 이양하면 민형사소송이 마비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도 했다. 떡은 누가 먹고 매는 국민이 맞는 꼴이다.
 
사법경찰관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명분은 좋으나 산더미같은 고소·고발건에 묻혀 허덕일 게 분명하다. 사법연수원처럼 경찰연수원이 필요하고, 인력증원 및 처우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일선 경찰서 수사과의 풍경은 영화에 자주 비치는 북새통과 다름없다. 지금도 1인당 밀린 사건이 100여 건에 달한다. 민주당은 진정 경찰을 아끼는 걸까. 전문지식 쌓는데 적어도 1~2년, 수사실 확장공사만도 6개월이 걸릴 텐데 법시행에 단 3개월 유예기간을 뒀다. ‘검수완박’은 경찰과 일반 서민, 고소인과 피의자를 북새통에 가두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검찰총장이 급기야 사표를 던졌다. 일선 검사들도 나설 채비다. 민주당의 강공을 철벽 수비할 불사조 한동훈. 법 바꿔 놓고 진정 ‘야반도주’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한동훈은 글래디에이터로 변신할지 모른다. 유배형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겁이 없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