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전설들 20년 만에 다시 뛴다..."지단·피구 혼쭐 냈던 실력 기대하시라"

중앙일보

입력 2022.04.13 11:01

수정 2022.04.1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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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다시 뭉친 2002년 한·일월드컵 주역과 후배 선수들. 김형일, 이천수, 이운재, 이을룡, 송종국, 김태영, 현영민, 정경호, 김용대, 최진철, 김두현(왼쪽부터). [사진 싸이더스 SL]

 
2002 한·일월드컵 축구대표팀 멤버는 한국 축구사에서 천하무적으로 불린다. 2002년 6월 거스 히딩크(76·네덜란드) 감독이 이끌었던 한국은 포르투갈(조별리그 3차전 1-0승), 이탈리아(16강전 연장 2-1승), 스페인(8강전 승부차기 5-3승) 등 우승 후보를 잇달아 무너뜨리며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다. 세계 축구계를 쇼크에 빠뜨린 일대 사건이었다. 
 
한·일월드컵 20주년이 되는 올해, 2002 멤버가 다시 뭉쳤다. tvN 예능 프로 '전설이 떴다 군대스리가(군대스리가·5월 7일 첫 방송)'를 통해서다. 전국 군부대를 방문해 한판 승부를 펼치는 내용이다. 군장병들을 직접 찾아가 응원하고, 오는 11월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20년 전 축구 열기를 되살리기 위한 프로젝트다. 병사 상당수가 2002년생이라서 더 뜻 깊다. 
 

2002년 월드컵 독일과 4강전을 앞두고 관중석에서 펼쳐진 '꿈은 이루어진다' 카드섹션. 오종택 기자

 
군대스리가에 나서는 2002 멤버는 김태영(52·천안시축구단 감독), 최진철(51), 이운재(49·전북 현대 코치), 이을용(47), 송종국(43), 현영민(43·울산 현대고 감독), 이천수(41·대한축구협회 사회공헌위원장) 등 7명이다. 맏형 김태영이 감독 겸 선수, 송종국이 주장이다. 2002 멤버 팀을 꾸려 경기에 나서는 건 20년 만에 처음이다. 
 
추후 추가 멤버 합류 가능성도 있다. 황선홍(한국 U-23 대표팀 감독), 홍명보(울산 현대 감독), 설기현(경남FC 감독) 등은 대표·프로팀 사령탑이라서 빠졌다. 우선 남은 자리는 2006·10 월드컵 멤버 정경호(성남FC 코치), 김두현(전북 코치), 김정우(안산 그리너스 코치), 김용대, 김형일(이상 JTBC 해설위원) 등 후배들이 맡는다. 


2002 멤버가 모인 수원월드컵경기장은 4강 신화의 출발점이 된 장소다. [사진 싸이더스 SL]

 
20년 만에 다시 뛰는 2002 멤버를 이른 아침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만났다. 4강 신화의 출발점이 된 뜻 깊은 장소다. 한국은 월드컵 개막 직전인 2002년 5월 이곳에서 프랑스와 평가전을 치렀다. 당시 프랑스는 디펜딩 챔피언이자, 우승 후보 0순위였다. 
 
지네딘 지단, 티에리 앙리, 다비드 트레제게 등 세계적인 수퍼 스타가 총출동했다. 한국은 접전 끝에 2-3으로 졌다. 하지만 '강팀을 상대로도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첫 훈련을 실시했다. 
 

2002년 당시 시청 앞 광장을 붉게 물들인 시민들의 거리 응원. [중앙포토]

 
 -20년 전 함께 전설을 썼던 멤버가 모였다. 다시 만난 소감은.  
이운재(이하 운재): 이벤트 경기 한 차례를 제외하면 2002 멤버가 모여 진지하게 축구하는 건 20년 만이다. 라커룸에 들어가는데, 국가대표 시절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이천수(이하 천수): 운재 형과 같이 몸을 푸는데, 대표팀 막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다. 다시 모여 즐겁고 설렌다.  
최진철(이하 진철):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이 흘렀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막내 천수가 마흔이 넘었다. 소중한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선후배들과 뛰어보겠나.  
김태영(이하 태영): 반가우면서도 아쉽다. 다들 몸 상태가 현역 시절 같지 않다. 은퇴한 지 수년이 흘렀다. 며칠 전 15분 정도 뛰었는데, 종아리를 다쳤다. 빨리 회복해서 팀에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뿐이다.  
 

매 경기 선방쇼를 펼치며 4강행을 이끈 '거미손' 이운재. [중앙포토]

다시 모인 2002 멤버는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인 선수로 이운재를 꼽았다. [중앙포토]

 
-월드컵을 앞두고 이곳,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치른 프랑스전은 의미가 남달랐다.  
현영민(이하 영민): 지단, 앙리, 트레제게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 우리가 대등한 경기를 했다. 강팀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뛰었다. 상대는 혼쭐이 난 셈이다. 
진철: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자세히 기억하는 게 신기하다.  
영민: 벤치 멤버였다. 그라운드에서 가장 가까운 곳, 잘 보이는 곳에서 경기를 봐서 형들의 플레이 하나 하나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송종국(이하 종국): 진철이 형, 왜 프랑스전을 기억 못하나. 나는 앙리와 일대일 대결 벌이는 사진까지 갖고 있다. 지단과 앙리도 많이 뛰니 우리처럼 힘들어하더라. 비록 패했지만, 강팀을 상대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프랑스전은 월드컵 본선에서 강팀을 치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진철: 내 경기력이 안 좋았던 것 같다. 좋았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웃음)  
 

프랑스와 평가전에서 지단(10번)을 마크하는 최진철(가운데). 오종택 기자

 
-가장 많이 변한 사람은.  
진철: 태영이 형이 많이 늙었다.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잘 못 뛴다. (웃음)  
종국: 태영이 형은 20대 때도 지금처럼 노안 아니었나.  
태영: 무슨 소리, 종아리만 치료하면 진철이보단 잘 할 자신 있다.
진철: 노안은 영민이다. 지금이나 20년 전이나 똑같다. (웃음)  
영민: 그런 소리 많이 듣는다. 앞으로 계속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게 목표다. (웃음)  
운재: 반면 종국이는 체력만 보면 현역 선수를 해도 되겠다. 많이 뛴다. 20대 때보다 더 잘한다. '히딩크의 황태자' 명성에 걸맞은 경기력이다.  
이을용(이하 을용): 운재 형 플레이를 보다 '살아있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반응 속도는 떨어졌지만, 노련한 펀칭과 방향 예측 능력은 전성기 때 그대로였다. 
 

김태영은 코뼈 골절에도 마스크를 쓰고 뛰는 부상 투혼을 펼쳤다. [중앙포토]

4강 진출을 확정한 뒤, 탈진해 쓰러진 최진철(오른쪽)을 걱정하는 이운재. [중앙포토]

  
-아들뻘 20대 병사들과 대결해야 하는데.  
종국: 현역 군인과 경기를 하면 선수들과 뛰는 것 같은 느낌이다. 워낙 힘이 좋고 빠르다. 지치지도 않는다. 나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최근 한 달간 술을 끊었다. 거의 매일 운동하며 몸을 만들었다. 초등학생과 경기해도 봐주지 않는다. (웃음)  
을용: 최근 근육 이완제를 먹기 시작했다. 최근 추울 때 축구를 해 무리한 모양이다. 원래 포지션인 측면에선 체력과 스피드가 부족해서 못 뛴다. 미드필더 희망한다.  
천수: 형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승부욕은 넘치는데 다들 몸이 말을 안 듣는다. 꾸준히 경기를 치르면서 실전 감각을 되찾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아파도 최선을 다하면서 청춘들에게 좋은 기운을 주고 싶다. 20년 전 그때 그 감동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하겠다.  
운재: 군인들은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한다. 2002년 월드컵 때도 군인들의 든든한 응원이 있었다. 이번 기회에 고마움을 갚겠다. 물론 요즘 세대는 우리 플레이를 유튜브에서만 봤을 거다. 우리와 경기가 좋은 추억이 되도록 멋진 잘 준비하겠다. 
 

송종국(오른쪽)은 피구에게 단 한 차례 돌파도 허용하지 않았다. [중앙포토]

독일과 4강전에서 클로제(오른쪽)에 한 발 앞서 볼을 걷어내는 김태영(가운데). [중앙포토]

 
이날 모인 멤버 대부분은 2002년 월드컵에서 팬에게 강한 인상을 심은 주인공이다. 김태영과 최진철은 홍명보와 '철벽 스리백'을 구축하며 주전으로 뛰었다. 김태영은 코뼈 골절 후 안면 보호 마스크를 쓰고 뛰는 부상 투혼을 펼쳤다. '거미손 골키퍼' 이운재는 경기마다 선방쇼를 펼쳤다. 측면 수비수 송종국은 필드 플레이어 중 유일하게 전 경기(7경기) 풀타임 출전한 '철인'이다. 특히 포르투갈전에서 발롱도르(축구 최고 권위상·2002년) 수상자이자, 에이스인 루이스 피구를 완벽 봉쇄했다. 이을용은 폴란드전에서 황선홍의 선제골을 도우며 사상 첫 월드컵 승리를 이끌었다. 이천수는 별명인 '밀레니엄 특급'처럼 저돌적인 돌파와 과감한 슈팅으로 공격에 힘을 보탰다. 
 
-2002년 월드컵을 치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진철: 이탈리아와 16강전에서 마크해야 했던 공격수 크리스티안 비에리를 놓치는 바람에 선제골을 내줬다. 앞이 캄캄해지더라. '다른 나라로 이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설)기현이와 (안)정환이가 골을 넣어줘 죽다 살아났다.  
태영: 천수가 이탈리아 수비수 파올로 말디니 머리를 차던 순간이 기억난다. 주심이 레드카드를 줘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별 문제 넘어갔다. 아찔했던 순간이다. 
천수: 태영이 형 때문에 그랬다. 이탈리아 선수들이 전부터 우리를 얕봤고, 경기에선 거친 플레이를 했다. 태영이 형은 비에리 팔꿈치에 맞아 코뼈가 부러졌다. 어린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발이 움직였다.  
태영: 진정한 전우애다. 고맙다 천수. 그래도 비에리 덕분에 '마스크맨'으로 유명해졌다. 스페인과 8강전부턴 안면을 보호하기 위해 마스크를 썼다. 검붉은 색이었는데, 팬들은 '타이거 마스크'라고 불렀다. 마스크를 쓰면 진짜 전투에 나가는 전사가 된 기분이었다.
천수: 독일과 4강전을 잊을 수 없다. 이길 줄 알았다. 0-1 패하긴 했지만, 우리 경기력도 좋았다. 슈팅 찬스에서 오른발로 반대편을 노리고 찼는데, 당시 세계 최고 수문장이었던 올리버 칸이 가까스로 쳐냈다. 독일 에이스 미하엘 발락은 내 저돌적인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태클하다 옐로카드를 받았다. 발락은 경고 누적으로 결승에서 뛰지 못했다.
 

이천수는 대표팀 내 선후배 문화를 바꾼 주인공이다. [중앙포토]

히딩크(왼쪽) 감독과 '히딩크 황태자'로 불린 송종국. [중앙포토]

 
-딱딱했던 선후배 문화가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달라졌다고.  
천수: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막내였던 나에게 선배들에게 반말을 쓰라고 지시했다. 긴박한 경기 상황 중에 더 빠른 소통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하루는 감독님 지시로 띠동갑인 명보 형에게 '명보야 밥 먹자'고 했다.  
진철: 그 순간 귀를 의심했다. 천수가 미친 줄 알았다. 나는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천수여서 가능했다.    
종국: 진짜 할 줄 몰랐다. 당시 막내급인 우린 고참급 형들 앞에서 고개도 못 들 때였는데, 반말을 하다니. 물론 나중엔 나도 했다. (웃음)
영민: 축구에선 반말이 필요하다. 빠른 시간에 패스를 의사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보야 밥 먹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웃음)
천수: 내가 총대를 멘 덕분에 경기 중 선후배 간 호흡이 좋아졌다.  
 

이천수(오른쪽)는 이탈리아 말디니의 마리를 발로 걷어찼다. 오종택 기자

이천수는 '밀레니엄 특급'으로 불리는 한국 최고 유망주였다. [중앙포토]

 
-지난해 6월 췌장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유상철 감독 생각이 많이 나겠다. 
천수: 우리가 다시 뛰는 모습을 보고 팬들이 상철이 형을 다시 떠올리고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상철이 형이 빠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2002 멤버는 영원히 23명이다. 
운재: 2002년 영상을 볼 때마다 생각난다. 한결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뛰는 동료였다. 항상 같이 뛴다는 생각이다. 
영민: 후배들에게 따뜻한 선배였다. 2002 멤버와 경기를 하는 동안엔 계속 생각 날 것 같다. 
태영: 프로그램을 통해 상철이 위해 뛰는 경기를 만들 계획이다. 영원한 우리 멤버다.  
 

송종국 질식 수비에 질린 피구가 '비겨서 나란히 16강에 진출하자'고 제안했다. [중앙포토]

 
한국 축구는 올해 다시 한번 '월드컵 신화'에 도전한다. 오는 11월 2022 카타르 월드컵이 개막한다. 한국은 포르투갈, 우루과이, 가나와 조별리그 H조에 편성됐다. 한국은 2002년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포르투갈을 1-0으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우승 후보였다. 1989 U-17 유럽축구선수권과 1991 U-20 월드컵에서 우승한 '황금 세대'가 주축이었다. 
 
-2002년 포르투갈전은 어땠나. 
종국: 잊을 수 없다. 내 축구인생 최고의 경기라서다. 포르투갈 에이스 피구를 막았는데, 90분 동안 단 한 번도 돌파를 허용 안 했다. 팬들이 '피구를 지웠다'고 했다. 당시 피구는 지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같은 존재였다. 기술과 스피드 모두 뛰어났다.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에서 지단(5번), 하나우두(9번) 등을 제치고 에이스의 상징인 등번호 10을 달 정도였으니까. 경기 후 전 세계 에이전시에서 (나와 계약하겠다는) 연락이 왔다고 하더라. 토트넘 이적 얘기도 있었다. 갔다면 손흥민 선배가 될 뻔했다. (웃음) 
태영: 포르투갈은 한국과 비기면 16강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은 1승 1무를 기록 중이라서 포르투갈보단 여유가 있었다. 
종국: 경기가 생각대로 안 풀리자, 피구가 다가와서 '비겨도 한국이 조별리그 탈락 아니다'라며 살살 뛰자고 영어, 포르투갈어 섞어서 말하더라. 우린 그런 것도 모르고 최선을 다해 이겼다. (웃음)  
천수: 포르투갈전은 그리 좋은 기억 아니다. 이 경기가 고향인 인천에서 열렸는데, 히딩크 감독이 나를 너무 늦게 투입했다. 가족, 친지 다 왔는데 3분 밖에 못 뛰어 아쉬웠다. 
 

이운재와 송종국은 한국 수비의 핵심이었다. [중앙포토]

 
-포르투갈 미드필더로 뛰었던 파울루 벤투 감독을 기억하나. 
천수: 그때 그 벤투가 우리 대표팀 감독이라는 건 한참 뒤에 알았다. 묘한 인연이다. 한국의 16강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태영: 나도 처음엔 같이 뛰었다는 걸 몰랐다. 공격수였다면 바로 알아차렸다. 당시 포르투갈엔 워낙 스타가 많았다. 벤투 감독은 플레이 스타일이 화려하기 보다는 차분한 편이라서 그랬다. 
 

한국과 카타르 월드컵에서 맞붙을 포르투갈의 에이스 호날두. [AP=연합뉴스]

손흥민이 이끄는 한국은 2002년 신화를 다시 한 번 쓰겠다는 각오다. [연합뉴스]

 
-카타르에서 뛸 후배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해달라. 
천수: 충분히 해볼 만한 상대들이다. 포르투갈이 가장 강하다는 평가지만, 플레이오프를 통해 간신히 본선 무대를 밟았다. 무엇보다 호날두는 전성기가 지났다. 반면 (손)흥민이는 지금 가장 잘한다. 이름값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한국이 부족할 게 없다. 형들이 이겨본 팀이니까, 흥민이와 후배들도 꼭 이기길 응원한다. 
운재: 2002년 4강은 과거다. 우리도 그렇다. 현재 대표팀 후배들이 새로운 전설을 써줬으면 좋겠다. 
을용: 자신감을 갖고 뛰길 바란다. 그럼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 20년 전 우리들이 그랬다. 
태영: 우리들이 축구 열기가 살아나는데 일조하겠다. 그 열기가 카타르 때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열심히 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