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왕족의 무덤인 피라미드와 영원한 삶을 향한 염원이 담긴 중국의 진시황릉 등은 소중 친구들도 잘 알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죠.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문화유산이 있답니다. 바로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 황제와 황후가 잠든 조선왕릉이에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조선왕릉전시관과 태릉을 찾아 500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조선왕릉에 대한 여러 사실을 들여다봤습니다.
조선왕릉 분포도
우리나라의 조선왕릉은 제1대 태조의 건원릉(健元陵)부터 제27대 순종·원비 순명효황후·계비 순정효황후의 유릉(裕陵)까지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총 40기가 분포해있어요.
"왕릉에는 유교가 통치이념이던 조선왕조의 효와 예가 반영됐다고 들었어요. 왕릉의 위치를 선정하는 기준이 궁금해요." 명성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크게 두 가지 기준이 있어요. 첫 번째는 풍수지리적으로 좋은 명당이어야 해요. 뒤로는 높은 산(주산)이 있고, 산 아래로 시냇물이 가로지르는 위치를 선호했는데 이걸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해요. 두 번째로 왕이 선왕의 무덤에 제향을 지내러 가기 적당한 거리여야 했기 때문에 지금의 서울·경기도 쪽에 주로 만들었죠. 왕이 궁궐을 오래 비우면 안 되니까요."(송) 이 기준에서 예외가 바로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무덤인 장릉(莊陵)입니다. 단종은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영월로 유배를 갔고, 노산군으로 격하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죠. 이후 제19대 숙종 때 왕으로 복위되면서 단종의 능이 영월에 건립돼요.
"어떤 계급 사람들이 왕릉에 묻힐 수 있었나요?" 송 큐레이터의 설명을 듣던 연우 학생기자가 말했어요. "묻힌 사람의 신분에 따라 무덤의 종류가 달라졌죠. 조선왕실 무덤의 종류는 능·원·묘로 나뉘어요. 왕·왕비와 황제·황후의 무덤은 능이라고 해요. 왕의 친부모·왕세자·왕세자빈,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은 원, 왕족·후궁·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은 묘라고 해요. 능이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며, 무덤 주변의 장식과 능역에 속한 건물 숫자도 많아요."(송) 여기서 황제·황후·황태자·황태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는 조선이 1897년을 기점으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인 대한제국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왕릉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왕릉 건립은 왕이나 왕비가 돌아가셨을 때부터 시작되죠. 이를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던 말인 승하(昇遐)라고 하며, 나라에서 치르는 상을 국상(國喪)이라고 해요. 국상은 장례에 관한 의례인 상례(喪禮)에 따라 진행되는데, 왕과 왕비의 능을 만들고 이들의 시신을 모시는 걸 전부 포함하죠. 복잡한 국상 절차를 잘 치르기 위해 임시 관청인 도감이 설치되곤 했어요. 장례를 치르고 능으로 향하는 발인 전까지 왕의 시신을 빈전에 모시는 빈전도감,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왕릉을 조성하는 산릉도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능침을 비롯한 능역에 속하는 각종 건물·석물들은 왕의 관을 능으로 모시는 발인 날에 맞춰 왕의 사망 후 약 5개월 안에 건립돼야 했어요. 이걸 산릉도감이 주관했죠. 산릉도감의 관원이 풍수지리에 통달한 지관과 함께 약 10곳의 명당을 골라 1차 능 후보지를 정한 뒤 왕에게 보고해 3곳 정도를 추리고, 이곳을 또 다른 지관들이 돌아보며 심사숙고해서 왕릉이 들어설 자리(능지)를 정했죠. 확정된 능지에는 사방에 경계를 표시하고, 그곳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 뒤 왕릉을 조성했어요."(송) 산릉도감이 공사에 필요한 인원과 자재의 양을 계산해 각 관청에 요청해서 인력과 물자를 확보하면 작업장이 꾸려졌죠. 공사가 끝나면 산릉도감에서 다른 관청과 주고받은 문서와 작업 일지를 모아 나라에서 큰일을 치를 때 그 경과를 자세하게 적은 책인 의궤(儀軌)를 펴냈어요. 후대에 왕릉을 조성·보수할 때 좋은 자료로 활용됐죠.
왕릉은 능침 공간에 따라 여섯 종류로 분류됩니다. 왕·왕비 중 한 사람의 봉분만 있으면 단릉(單陵),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배치하면 쌍릉(雙陵), 왕과 왕비, 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인 계비의 봉분까지 세 개를 나란히 배치하면 삼연릉(三連陵), 왕과 왕비의 무덤이 하나의 봉분 안에 같이 있으면 합장릉(合葬陵), 같은 능역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배치하면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한 언덕 위아래에 각각 봉분을 배치하면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죠. "왕과 왕비가 한날한시에 승하한 게 아닌데 어떻게 같은 무덤에 묻었나요?" 명성 학생기자가 질문했어요. "조선 제4대 왕 세종과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영릉(英陵)의 경우 소헌왕후가 먼저 사망했을 때 세종이 본인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어요. 하지만 현존하는 조선왕릉 합장릉을 보면 거의 왕릉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면서 합장릉을 만들거나, 먼저 승하한 사람을 이장해 나중에 승하한 사람과 함께 묻는 경우가 더 많았죠."(송)
조선왕릉, 누가 만들고 어떻게 관리했을까
조선왕릉의 능역은 크게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제1전시실엔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을 순서대로 구현해뒀죠. 가장 먼저 왕릉 관리자인 능관이 지내는 업무 공간이자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다음에는 바닥에 돌다리 모양의 그림이 있었어요. 앞서 왕릉 앞에는 물이 흐른다고 했죠. 이 하천을 금천, 그 위에 놓인 돌다리는 금천교라고 해요. 금천을 건너면 신성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홍살문이 나오죠.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두 개 위에 가로대를 놓고, 화살 모양 나무살을 가로대 위에 꽂은 홍살문은 사당·관아·향교·서원 등에도 있어요.
홍살문과 정자각을 잇는 길인 향어로, 제향을 지내는 건물인 정자각, 제향에 올리는 음식을 준비하는 수라간, 능을 지키는 일꾼들이 머무는 수복방까지가 제향공간이에요. 왕의 무덤인 봉분과 그 주변을 꾸민 석물이 있는 곳은 능침 공간이죠.
조선왕릉의 기본 구조
왕릉에 따라 차이가 다소 있지만, 조선왕릉의 기본 구조는 금천교와 재실을 포함하는 진입 공간, 홍살문·향어로·정자각·수라간·수복방을 포함하는 제향 공간, 왕의 무덤인 봉분과 그 주변의 석물을 포함하는 능침 공간으로 구분합니다.
모든 공간은 왕릉을 관리하는 능관(참봉 또는 영)과 그를 돕는 일꾼들에 의해 관리·유지됐어요. 기록으로 남아있는 제9대 성종과 정현왕후의 선릉 관리 업무 분장을 예로 들어볼까요. 능침 구역 청소·경비를 맡은 수복은 수라간 맞은 편에 있는 수복방에 머무르며 매일 능침과 정자각·비각·수라간을 청소하고, 아침마다 능관에게 능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고했어요. 서원·청직은 능관의 일을 보좌했으며, 천호는 제사 음식 놓기와 능역의 나무를 몰래 베어 가는 도벌꾼 체포를 맡았죠. 군인은 땔나무, 화정은 음식 만들기를 담당했고요. 왕릉에 딸린 토지는 매우 넓어 이를 지키는 군사의 수도 상당했어요. 수호군은 70명, 수호군을 보좌하는 보군과 산직은 각각 140명과 30명에 달했죠. 주로 양인 신분의 백성들이 동원됐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보면 왕의 시신과 함께 여러 보물을 묻었더라고요. 조선왕릉 안에는 어떤 부장품이 있었나요?" 해원 학생기자가 질문했어요. "왕·왕비의 관을 재궁이라 해요. 조선 시대에는 왕릉에 재궁을 모시고 나서 흙을 메우기 전 국장도감에서 마련한 부장품을 함께 넣었어요. 종류도 돌아가신 분을 위로하고자 예물로 올리는 옥과 비단, 생전에 착용했던 옷·장신구, 생전에 짓고 읽었던 책과 붓·벼루 등 다양했죠. 능은 왕이 승하한 뒤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에 식기·제기·악기·무기 등을 실제보다 작은 크기로 만들어 넣기도 했어요. 이를 명기라고 해요."(송) 부장품은 종류별로 상자에 넣어 왕의 관을 능으로 모실 때 함께 운반했죠. 소중 학생기자단이 기록에 따라 복원한 명기들을 주의 깊게 살펴봤어요.
예로부터 왕의 무덤은 도굴이 잦았습니다. 한 나라의 권력자를 모신 무덤이니만큼 보물이 많기 때문이죠. 하지만 조선왕릉은 임진왜란 중이던 1592년 손상을 입은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선릉(宣陵)과 제11대 중종의 정릉(靖陵) 외에는 도굴당한 적이 없어요. 내부 구조에 쓰인 독특한 건축 기술 덕분이죠.
봉분 아래에는 재궁을 모시는 방이 있어요. 조선 초에는 재궁을 돌로 만든 방인 석실에 모셨지만, 제7대 세조 이후에는 석회·모래·황토 등 삼물을 섞어 만든 회격으로 방을 만들어 재궁을 모셨어요. 세조가 "국장에 있어 비용의 낭비와 백성의 수고가 심하니 석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죠. 회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해지기 때문에 쉽게 뚫을 수 없어요. 현대에 와서도 왕릉을 도굴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지만, 요즘 기술로도 회격을 쉽게 무너뜨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왕릉은 잘 보존되고 있답니다.
조선왕릉전시관 옆에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泰陵)이 있어요. 명성·연우·해원 학생기자는 태릉으로 이동해 전시관에서 살펴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로 했죠. 소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다 보니 바닥에 돌로 만든 구조물이 보였어요. "이건 태릉 금천교의 흔적이에요. 한국전쟁 이후 훼손된 것으로 추정하죠."(송) 금천교를 뒤로하고 걸으니 홍살문이 눈앞에 나타났어요. "현재 태릉에는 재실이 없지만 원래 금천교와 재실까지가 진입 공간이에요. 태릉 재실의 원래 위치는 조선왕릉전시관 옆으로 약 180m 정도 떨어진 근처로 추정합니다."(송)
문석인·무석인의 크기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어요. 조선 초기에는 약 2m 정도였는데 중종~명종 대(1506~1567)는 3m에 달했죠. 이후 18세기 전반엔 약 1.5~1.8m 정도로 작아졌어요. 하지만 정조가 아버지 장조(사도세자)를 위해 만든 현륭원(융릉)의 석물을 이전보다 훨씬 화려하게 조각하면서 다시 약 2.4m 정도로 커졌어요. 이러한 경향은 20세기 대한제국 황제릉인 홍릉·유릉에도 이어져 3m가 넘는 문석인과 무석인이 세워졌죠. 16세기 조성된 태릉의 문석인·무석인의 크기는 약 3.2m인데요. 선이 굵고 몸집이 큰 조선 중기 경향을 잘 보여주죠.
세계적으로 한 왕조의 무덤이 조선왕릉처럼 온전히 보전된 경우는 드물다고 해요. 약 5세기 동안 의례에 따라 조성된 조선왕릉은 왕실의 권위와 선조를 기리는 마음은 물론, 관련 유물과 유적의 변화를 통해 조경학·건축학·석조미술학은 물론 역사와 정치까지 당시 시대상과 문화까지 보여주죠. 이번 주말 조선왕릉을 찾아 우리 조상의 얼과 역사를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꼭 가봐야 할 조선왕릉 4
송진욱 큐레이터가 소중 친구들을 위해 대한민국에 있는 40기의 조선왕릉 중에서도 꼭 가보면 좋을 네 곳을 추천했어요.
동구릉 건원릉(태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1408년 조성된 조선 제1대 태조의 능이에요. 9개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어요. 고려 왕릉의 영향을 받아 능침 공간을 구성한 건원릉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무덤답게 후대 조선 왕릉 조성에 큰 영향을 줬어요.
영릉(세종·소헌왕후):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10
1469년 조성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이에요.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분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으로, 소헌왕후를 향한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 있죠. 영릉의 배치는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라 할 수 있어요.
융건릉 융릉(장조):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에요. 1762년 사망한 사도세자는 능이 아닌 묘에 묻혔어요. 이후 장조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묘를 원으로 격상시켰죠. 원으로 조성되었음에도 정조의 효성이 반영돼 능급으로 꾸며진 것이 특징이에요.
홍유릉 홍릉(고종·명성황후):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1897년 세상을 떠난 명성왕후와 1919년에 승하한 고종황제의 능이에요.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홍릉도 황제릉으로 조성됐죠. 고무래 정(丁)자의 정자각 대신 일(一)자형 침전이 들어섰으며, 주로 봉분 앞뒤에 배치되던 돌로 만든 동물(석수)들과 문석인·무석인 등이 침전 앞에 나오는 배열로 바뀌었어요.
동구릉 건원릉(태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1408년 조성된 조선 제1대 태조의 능이에요. 9개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어요. 고려 왕릉의 영향을 받아 능침 공간을 구성한 건원릉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무덤답게 후대 조선 왕릉 조성에 큰 영향을 줬어요.
영릉(세종·소헌왕후):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10
1469년 조성된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이에요.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분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으로, 소헌왕후를 향한 세종의 지극한 사랑을 엿볼 수 있죠. 영릉의 배치는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라 할 수 있어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어머니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에요. 1762년 사망한 사도세자는 능이 아닌 묘에 묻혔어요. 이후 장조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묘를 원으로 격상시켰죠. 원으로 조성되었음에도 정조의 효성이 반영돼 능급으로 꾸며진 것이 특징이에요.
홍유릉 홍릉(고종·명성황후):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1897년 세상을 떠난 명성왕후와 1919년에 승하한 고종황제의 능이에요.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였기 때문에 홍릉도 황제릉으로 조성됐죠. 고무래 정(丁)자의 정자각 대신 일(一)자형 침전이 들어섰으며, 주로 봉분 앞뒤에 배치되던 돌로 만든 동물(석수)들과 문석인·무석인 등이 침전 앞에 나오는 배열로 바뀌었어요.
학생기자 취재 후기
조선왕릉전시관에서 조선 왕의 장례절차와 왕이 쓰던 물건들을 작게 만들어 넣었던 부장품에 대해 알게 됐어요. 취재 전 관련 영상을 찾아보다가 조선시대 사람들은 무덤을 망자의 생활공간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그런 의미에서 했던 행위 같아요. 전시관 옆에 있는 태릉도 둘러봤는데요. 입구를 지나 산책로를 지나면 볼 수 있는 능은 여러 석상이 둘러싼, 일반인의 무덤에 비하여 엄청나게 큰 규모였죠. 하지만 홀로 있는 단릉이라서 조금은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태릉에는 입구부터 엄청나게 많은 소나무가 있었어요. 덕분에 무덤이지만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숨을 쉬면 상쾌하고 마음이 편안하단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정돈이 잘된 공원 같아서 친구들과 소풍을 와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다음에는 태릉 옆에 있는 강릉도 가보고 싶어요.
고명성(서울 강명초 6) 학생기자
최근 역사에 관심이 많이 생겼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을 취재할 수 있어서 너무 뿌듯했어요. 역사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공부하려면 이동 거리도 길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가까운 곳에서 역사 탐방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먼저 방문한 조선왕릉전시관에서는 왕릉에 제향 시 무슨 음식을 올리는지, 왕릉의 종류와 조성 과정 등을 알 수 있었어요. 그 뒤 태릉에 갔는데 정자각에서 볼 때는 봉분과 석상이 작아 보였지만 실제로 언덕을 올라가 보니 커서 놀랐죠. 정자각에서 볼 때는 제 키 정도 될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제 예상보다 두 배 정도 컸거든요. 서울·경기 지역과 가까우면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인 만큼 여러분도 조선왕릉에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서연우(서울 월계초 5) 학생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태릉에 대해 취재하게 돼 정말 기쁘고 설렜어요. 이집트 투탕카멘의 황금빛 무덤이나 중국 황제의 웅장한 무덤과 달리 인위적인 꾸밈보다는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중시하는 조선왕릉은 색다른 느낌이었죠. 무덤 안에는 멋진 귀금속 장신구나 값진 보물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무기·악기·술잔·수저 등 작은 크기의 생활 소품들을 넣었다는 점에서 당시 사후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태릉에서 섬세하게 조각된 석물들과 정성스럽게 만든 무덤을 보고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죠. 정자각에서 봤을 때는 왕릉이 정말 작아 보였는데, 직접 올라가서 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커서 그 웅장함에 놀랐어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태릉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유익한 취재였죠. 왕릉을 지켜주는 하늘, 나무, 바람의 소리를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이 왕릉의 가치를 알고 아껴줬으면 좋겠어요.
정해원(서울 중대초 4) 학생기자
고명성(서울 강명초 6) 학생기자
최근 역사에 관심이 많이 생겼는데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릉을 취재할 수 있어서 너무 뿌듯했어요. 역사 현장을 직접 둘러보고 공부하려면 이동 거리도 길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가까운 곳에서 역사 탐방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먼저 방문한 조선왕릉전시관에서는 왕릉에 제향 시 무슨 음식을 올리는지, 왕릉의 종류와 조성 과정 등을 알 수 있었어요. 그 뒤 태릉에 갔는데 정자각에서 볼 때는 봉분과 석상이 작아 보였지만 실제로 언덕을 올라가 보니 커서 놀랐죠. 정자각에서 볼 때는 제 키 정도 될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제 예상보다 두 배 정도 컸거든요. 서울·경기 지역과 가까우면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인 만큼 여러분도 조선왕릉에 관심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아요.
서연우(서울 월계초 5) 학생기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태릉에 대해 취재하게 돼 정말 기쁘고 설렜어요. 이집트 투탕카멘의 황금빛 무덤이나 중국 황제의 웅장한 무덤과 달리 인위적인 꾸밈보다는 자연과의 어우러짐을 중시하는 조선왕릉은 색다른 느낌이었죠. 무덤 안에는 멋진 귀금속 장신구나 값진 보물들이 있을 줄 알았는데 무기·악기·술잔·수저 등 작은 크기의 생활 소품들을 넣었다는 점에서 당시 사후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태릉에서 섬세하게 조각된 석물들과 정성스럽게 만든 무덤을 보고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을 느낄 수 있었죠. 정자각에서 봤을 때는 왕릉이 정말 작아 보였는데, 직접 올라가서 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커서 그 웅장함에 놀랐어요.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태릉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던 유익한 취재였죠. 왕릉을 지켜주는 하늘, 나무, 바람의 소리를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이 왕릉의 가치를 알고 아껴줬으면 좋겠어요.
정해원(서울 중대초 4) 학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