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0〉
중국 북베트남 지원금 항미원조 능가
중국의 정식 출병은 그 유명한 통킹만 사건 이후였다. 미국이 북폭을 감행하자 북베트남은 중국과 소련에 구원을 청했다. 1965년 4월, 베트남공산당 영수 레주언이 베이징을 방문해 파병을 요구했다. 2개월 후 북베트남 군복으로 갈아입은 중국인민해방군이 비밀리에 베트남으로 이동했다. 1973년 미군이 철수할 때까지 중국은 연 32만명을 베트남에 보냈다. 비밀유지에 신경을 썼다. 북베트남 군복을 착용해도 하노이 출입을 엄금했다. 지휘관들의 중국대사관 출입도 물론이었다.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공병도 남색의 노동자 차림으로 땀을 흘렸다. 8년간 1100명이 사망하고 4200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도 비밀유지를 위해 베트남에 매장했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중국과 소련, 베트남과 크메르루즈의 관계와 흡사했다. 입으로만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를 외쳤다. 실상은 패권주의와 민족주의를 추구했다. 모순이 발생하면 왕년의 혁명 전우들과 너 죽고 나 살기가 일상사였다. 중·소 관계가 파열되자 동남아의 공산당도 출렁거렸다. 베트남공산당은 친소를 표방했다. 크메르루즈 지도자 폴포트는 중국에 붙었다. 중국 측 자료에 의하면 폴포트는 세 번 중국을 방문했다. 1965년 중국에 가서 3개월 머무르며 눈을 떴다. 마오쩌둥 선집을 보물단지처럼 모시고 돌아와 크메르루즈를 개조했다. 혁명노동당이었던 당명도 캄보디아공산당으로 바꿔버렸다. “농촌에 근거지를 구축해 도시를 포위한다”는 마오의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 3년 후, 1968년 1월 혁명근거지를 건립하고 캄보디아 혁명군을 결성했다. 정권탈취 계획이 수립되자 다시 베이징을 찾았다. 4인방의 일원인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와 야오원위안(姚文元·요문원) 등 중국의 상층부와 교분을 텄다. 당시 중국은 문혁이 한창이었다. 폴포트는 홍위병운동에 감동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터진 승려들이 “불경은 무슨 놈의 불경이냐”며 불교 경전 불사르는 모습에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텐안먼 광장에 수녀복 입고 꿇어앉아 벌서는 외국 수녀들은 가관이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덩, 방미 때 세계에 중국 선풍 일으켜
폴포트가 정권을 탈취하자 양국의 역사적인 민족모순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78년 11월,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베트남이 중국의 지원을 받는 폴포트 정권 타도에 나섰다. 중국의 새로운 집권자 덩샤오핑은 소련과 결탁한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을 감지하자 분노했다. 배은망덕한 베트남에 본때를 보여주려면 소련을 묶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베이징을 방문한 카터 대통령의 특사 브레진스키에게 시간만 끌던 미·중 수교를 매듭짓자고 제안했다. 브레진스키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키신저가 중국의 지도자들에게 반소(反蘇)정서를 선동하고, 미·중 냉전의 위험성을 과대포장한 결과였다.
정치 지도자에겐 연기력도 필요하다. 삼류 연출가의 기획에 움직이는 국가원수의 깜짝쇼는 한두 번이면 모를까, 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국격을 떨어뜨린다. 정식 수교 3주 후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중국 선풍을 일으켰다. 9일간 강행군에 몸살을 앓으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챙길 것은 다 챙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