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찾은 연습실에서는 ‘리어’ 원작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다양한 시각적, 청각적 시도가 한창이었다. 무대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물(水)이다. ‘리어’가 오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14.6m×9.6m)에는 물 20t이 들어차게 된다. 수조 같은 형태의 틀에 담기는 물은 바닥에서 15㎝ 높이까지 올라온다. 연습실 무대에는 물이 없지만, 배우와 합창단은 물 위를 걷듯 동작을 연습했다. 물을 상정한 그들의 동작은 중력을 이겨내는 듯 떠다녔다. 총 10회 공연을 견뎌낼 아쿠아 슈즈를 따로 마련했다고 한다.
물탱크에서 20t의 물을 끌어다가 무대를 채우고 중간에 모두 뺐다가 다시 차오르게 하는 작업은 무대 디자이너 이태섭의 몫이다. 수많은 연극과 창극, 뮤지컬,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맡았던 그는 이번 공연의 물에 대해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대변한다”고 했다. “마지막 장면의 코딜리어가 다시 차오른 물 위에 누워서 죽는다. 자연의 이미지와 인생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1막 4장에서는 광대가 리어의 상태를 풍자하며 장기타령, 배치기 같은 민요를 차용하고, 에드거가 방황하는 리어를 만나는 10장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생, 공수래공수거라”하는 부분이 유머러스하게 흐른다. 2박의 비트가 강조된 악기 편성에 힙합을 하듯 노래가 흐른다. 두 스타 음악가는 창극의 특성에 맞게, 그러면서도 현대 청중에게도 낯설지 않게 음악을 배치했다.
이처럼 현재 한국 공연계의 내로라할 호화 제작진이 함께한 공연이다. 안무가로 시작해 음악극으로 영역을 넓힌 정영두의 연출,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 배삼식의 극본으로 작품의 틀을 잡았다. 여기에 판소리로 시작해 ‘변강쇠 점 찍고 옹녀’ 등 히트 창극의 작창을 맡았던 음악감독 한승석의 작창과 영화 ‘옥자’ ‘기생충’ 등의 음악감독으로 유명한 정재일의 작곡으로 색을 더했다.
출연진 면면도 만만치 않다. 창극에서 팬덤을 만들어낸 소리꾼 김준수가 31세 나이에 리어 역을 맡았고, 판소리계 스타 유태평양이 글로스터로 출연한다. 국립창극단의 간판 이소연이 리어의 첫째 딸 거너릴로, 국립창극단에서 ‘넥스트 김준수’로 꼽히는 김수인이 에드먼드로 나온다. 화려한 제작진 및 출연진과 대조적으로 무대 위 고찰은 진지하고 차분하다. 연습에서도 김준수는 젊은 주연이라는 정체성보다, 분노와 원망에 휩싸인 노인 역에 집중해 극을 이끌어갔다. 연기와 노래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늙고 지친 리어의 상황을 적절하게 표현했다.
정영두 연출가는 “절대 악이나 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정확한 규칙에 의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무대, 의상, 배우 움직임은 작품의 시대나 장소 등 구체적 배경을 드러내지 않는다. “유럽이거나 동양일 수도, 수백 년 혹은 지금일 수도 있다.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중립적이고 입체적인 표현을 부탁하고 있다.”
창극 ‘리어’는 17~27일(화~목 오후 7시 30분, 토~일 오후 3시)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