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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규의 아하, 아메리카] 탱크 대신 뱅크…푸틴 에워싼 ‘돈의 장막’을 깬다

중앙일보

입력 2022.03.0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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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규 워싱턴특파원

“탱크를 가지고 싸울 수 없다면 뱅크(Bank·은행)에서 싸워라.”
 
국제 정치에서 무력 도발을 막기 위한 경제 제재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신흥 재벌(올리가르히)을 정조준한 제재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직접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으니 ‘탱크 대신 뱅크’로 러시아를 징벌하겠다는 의도다.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이번 조치가 “러시아에 대한 타격은 극대화하면서 미국과 동맹에 미칠 영향은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젤렌스키 암살조 보낸 ‘푸틴의 요리사’  


푸틴의 요리사 예브게니 프리고진

제재 대상에 오른 7명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예브게니 프리고진이다. 1980년대 사기·절도 혐의로 복역했던 그는 노점으로 성공해 식당사업을 시작한 뒤 크렘린궁 만찬에까지 음식을 공급하게 됐다. 이 때문에 ‘푸틴의 요리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본격적인 조력자가 된 것은 사설 용병업체인 ‘와그너 그룹’과 온라인 업체 ‘인터넷 리서치 에이전시(IRA)’를 세우면서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와그너 그룹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할 때도 용병을 보냈다. 시리아·수단 등 여러 내전에 개입해 민간인 학살과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번 우크라이나 침공 때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겨냥해 암살조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IRA는 또 다른 방식으로 악명 높다. 러시아가 국내외를 상대로 운영해왔던 대표적인 ‘트롤 팜(troll farm, 댓글 공장)’이다. 소셜미디어에서 가짜 계정을 대량으로 만들어 허위 정보를 올리는 방식으로 2016년 미국 대선에 개입한 의혹을 받고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프리고진을 지명수배해 25만 달러(약 3억430만원)의 현상금을 걸었다.
  
가스관 사업 독점 푸틴의 유도 친구
 

유도 친구 아르카디 로텐베르그

러시아 최대의 인프라 건설업체인 스트로이가즈몬타슈(SGM)그룹을 소유한 아르카디 로텐베르그는 푸틴의 유년 시절 친구다. 유도 트레이너로도 활동했고, 푸틴의 연습 상대가 돼주기도 했다.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인 가즈프롬의 자회사들을 인수해 SGM그룹을 차리면서 승승장구했다. 가즈프롬이 발주하는 가스관 사업을 거의 독식했고, 독일-러시아 간 가스 사업 ‘노르트스트림-2’에도 참여했다. SGM의 주주인 동생 보리스 로텐베르그도 함께 제재 대상에 올랐다.
 
소치 동계올림픽 공사 등 대형 국책사업을 따냈는데, 특히 과거 시공 실적이 없는데도 크림 반도와 러시아 땅을 잇는 크림 대교 역시 이 회사가 건설했다. 2015년 착공식에는 푸틴 대통령이 직접 덤프 트럭을 몰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연출했다.
  
푸틴 비판 기자 해고 … 세계 최대 요트 소유
 

세계 최대 요트 소유자 알리셰르 우스마노프

포브스 선정 세계 억만장자 100위에 들어 있는 알리셰르 우스마노프는 자산이 195억 달러(약 23조6000억 원)에 달한다. ‘딜바르’라는 세계 최대의 요트를 소유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앞서 이 요트가 독일 함부르크의 한 조선소에 압류돼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는데 독일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그가 가진 러시아에서 가장 큰 개인 전용기 역시 제재 목록에 올라 있다.
 

알리셰르 소유 요트 ‘딜바르’.

철강업체 ‘메탈로인베스트’의 공동 창업자로 금속·광업·통신·IT까지 문어발로 사업을 확장했다. 코메르상트라는 신문과 주간지도 발행하고 있는데, 2011년 선거 이후 푸틴을 비판하는 기사가 나가자 편집자와 대표이사를 해고했다. 푸틴 대통령과의 각별한 사이 때문에 직접 검열에 나섰다는 논란이 일었다.
 
그 밖에 송유관 업체 트란스네프트 최고경영자(CEO) 니콜라이 토카레프, 구 소련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출신인 세르게이 케메조프, 부총리를 지낸 이고르 슈발로프 국가개발공사 회장도 제재 대상이다.
  
미국·EU 내 리조트·요트 압류
 

푸틴

이들 대부분 유럽과 미국에 호화 아파트·리조트를 가지고 있다. 개인 요트 역시 해당 지역에 정박해 있다. 미국과 EU는 이를 압류해 불법 재산을 환수한다는 계획이다. 또 이런 재산에 접근조차 못 하도록 19명의 올리가르히와 이들의 가족·측근 47명의 비자도 제한하기로 했다.
 
월리 아데예모 미 재무부 부장관은 “이들의 전용 여객기 역시 미국과 EU·일본으로 들어오는 순간 압류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 때 올리가르히 선택 중요
 
미국이 올리가르히를 조준한 것은 백악관 설명대로 “푸틴에게 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손발을 묶으면 푸틴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단 회의적인 반응도 많다.
 
이미 위장기업이나 차명으로 재산을 숨겨놨을 뿐 아니라, 현재 권력 구도상 러시아 신흥 재벌들이 푸틴에게 직언을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의 네이트 시블리 연구원은 “부와 명성을 잃은 올리가르히들의 실망감은 크겠지만, 누구도 감히 푸틴을 개인적으로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들은 더는 강력한 ‘프레너미(친구와 적을 합친 조어)’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장기적으로 러시아 경제를 압박해 푸틴에게 결국 치명타가 될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마리아 샤기나 포린폴리시 리서치 인스티튜트 러시아 담당은 “(이번 제재로) 러시아 경제는 1990년대 불황으로 갈 것”이라며 “결국 내부 불안이 커지고 혁명 조짐이 있을 때 올리가르히들이 어느 편에 서느냐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