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나흘째에 접어든 28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 대사관. 기자회견에 나선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의 말은 우크라이나에 쏟아붓는 미사일만큼이나 거침 없었다. 첫 마디는 "존경하는 한국 기자 여러분"이었지만, 곧 "한국 매체들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완전히 서방 시각에서 보도하는 바람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고 날을 세웠다.
이날 오후 3시11분 시작된 기자회견은 오후 4시50분 끝났다. 99분의 시간을 쿨릭 대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주장으로 꽉 채웠다. 한국 정부는 물론 대다수 한국 언론이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는데, 러시아 비판 세력을 대놓고 "작자"로 칭했다. 대사의 역할은 주재국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기본적 원칙도 아랑곳 않는 듯 했다.
침공해놓고 '제재 피해자' 코스프레
제재를 문제 삼으면서는 러시아가 피해자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 주도의 제재에 동참하는 나라들을 "가해자"로 부르며 "러시아를 겁 주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이 대러 제재에 동참하는 데 대해서는 "한국이 지금 받고 있는 강력한 외부 영향이 제재를 실시하는 유일한 요소"라고 주장했다. 주재국 정부의 공식 결정을 원칙 없이 외압에 흔들린 결과로 폄하하는 것처럼 해석될 소지가 있는 발언이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남·북·러 3각 협력 사업(가스ㆍ철도ㆍ전기)을 언급하며 "러시아에 가해진 제재는 이런 프로젝트 추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그런 생각을 하면 한국이 정말 이 모든 것이 필요할까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이 대러 제재에 동참했으니 러시아를 고리로 한 남북 경제 협력에서 지원은 바라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민간인 피해도 "가짜 뉴스" 폄하
특히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한다는 보도에 대해 "일부러 비극이 일어난 것처럼 만들려는 시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치 세력은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썼다. 과거 시리아에서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는 역할을 시키고 급여를 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까지 나서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민간인이 100명 넘게 사망했다"(제49차 유엔 인권이사회 정례 회의)고 발표했는데, 쿨릭 대사는 "이런 보도는 건별로 팩트 체크를 해야 한다"며 열을 올렸다. 들것에 실려 병원에 옮겨진 뒤 끝내 사망한 우크라이나 어린이의 모습이 그에게는 그저 페이크 영상처럼 보였나 보다.
쿨릭 대사의 이런 태도는 지난 25일 열렸던 드미트로 포노마렌코 신임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의 기자회견과 대조됐다. 러시아 침공 이튿날이었는데도 포노마렌코 대사는 러시아를 향한 노골적인 비판 없이 '외교관의 언어'를 썼다. 비교적 담담하게 자국 상황을 전하며 국제사회의 지원을 촉구했다. "러시아의 공격은 유엔 헌장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어긴 것이므로 국제기구는 러시아의 회원국 자격 정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게 그나마 가장 수위가 높은 발언이었다.
당시 포노마렌코 대사는 "현재 상황이 최악의 시나리오"라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반면 이날 쿨릭 대사는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포기하는 것을 "아주 완벽하고 바람직한 시나리오"라고 추켜세웠다. 침공한 쪽은 사실상 우크라이나의 굴복이 '최선의 시나리오'라며 기세등등한데, 침공당한 쪽은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안타까운 적반하장의 상황이다.
가방 반입도 금지, 질문도 제한
이에 대사관 한 켠에 기자들의 소지품이 수북히 쌓이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기자들 사이에선 '당황스럽다'는 반응이 나왔다. 다른 대사관에도 출입 시 소지품 반입을 금지하는 경우가 있지만, 보관함 등 안전하게 맡길 공간을 마련하는 게 통상적이기 때문이다.
역시 지난 24일 우크라이나 대사관 기자회견에선 전혀 없었던 조치다.
쿨릭 대사는 예정된 회견 시간보다 11분 늦게 입장했고, 역사적 배경까지 읊으며 침공 정당성에 대해 1시간에 걸쳐 사실상의 '연설'을 이어갔다. 기자들의 질문도 제한됐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15개 사 중 5개사만 질문 기회를 얻었는데, 그마저도 최근 대사관 측에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는 매체에만 우선권을 줬다.
기자회견 말미에 쿨릭 대사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이들을 향해 "예의 없고 노골적으로 군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정작 99분의 회견 동안 주재국에 외교적 결례에 해당할 수 있는 발언을 거듭하고, 국제사회의 정당한 비판을 폄하한 것은 자신이란 점은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