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국회에서 한 시정 방침 연설에는 러시아에 대한 ‘구애’가 가득했다. “평화조약 체결” “교섭” “발전” 등 긍정적인 문구로 채워진 대러시아 정책 바로 뒤, “일관된 입장에 근거해 적절한 대응을 강하게 요구한다”는 한국 관련 딱 한 문장이 등장해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러시아가 실효 지배 중인 쿠릴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을 돌려받겠다는 목표 아래 그동안 일본은 러시아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했을 땐, 미국과 유럽이 제재를 선언한 뒤에도 한참을 미적거리다 사실상 ‘솜방망이’ 조치를 내놓는 ‘독자 외교’를 보여줬다.
일본이 망설임 없이 태도를 바꾼 배경에는 중국이 있다는 분석이 많다. 일본의 한 외교소식통은 “크림반도 사태 때와 지금의 차이는 중국의 부상이다. 일본이 지난번처럼 제재에 소극적으로 나설 경우, 중국이 비슷한 군사 행동에 나설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대만도 위험해진다는 판단이다. 일본 국민도 정부의 태도 변화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한 여론조사에서 61%가 “일본이 미국·유럽과 보조를 맞춰 러시아에 대응해야 한다”고 답했다.
일본이 군사 전략의 중심을 중국 견제로 옮긴 데는 ‘러시아와의 긴장 완화’라는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일본의 강한 대응으로 “일본의 향후 안보 전략에 파급이 예상된다”(니혼게이자이신문)는 분석이 이어진다. 중국·북한에 러시아까지 위협 요소로 더해지면, 미국의 강한 요구 하에서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더 적극적으로, 대담하게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예상치 못했던 전쟁이 국제 사회의 구도를 크게 뒤흔들고 있다. 각 나라는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한다. 한국은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전쟁의 포화 속에서 맞이하는 103번째 3·1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