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이날 오후 문재인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보고를 받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경제 제재를 포함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지지를 보내며 이에 동참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외교부 당국자는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일부 국가의 경우엔 금융 제재를 포함한 (대러) 독자 제재를 고려하고 있는데, 저희는 이걸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독자 제재'엔 굳이 선 긋는 정부
이에 대해 외교부 당국자는 “한국은 국제 경제상의 지위도 있고, 적극적으로 제재에 참가하겠다는 메시지를 내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동참하게 될 제재 조치에 대해선 관련 부처에서 검토를 하고 있다. 또 이같은 제재 조치로 인해 경제와 우리 기업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도 같이 모색하고 필요한 지원을 해 나간다는 입장”이라면서다.
크림반도 때처럼 '암묵적 제재' 가능성
크림반도 사태 당시에도 정부는 별도의 독자 제재를 발표하진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의 에너지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전면 중단하는 방법으로 미국과 보조를 맞췄고, 이는 사실상 독자 제재를 시행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를 냈다.
실제 미국이 협력을 요청한 제재는 크게 금융 제재와 수출 통제인데, 수출 통제는 꼭 독자 제재의 형식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현행 대외무역법은 무역 상대국에 전쟁이 발생하거나 국제법규에서 정한 국제평화와 안전유지 등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에는 물품 수·출입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번에도 정부가 비슷한 구상이라면, 이는 결국 한·미 동맹과 한·러 관계를 모두 고려한 ‘균형 외교’를 중심에 놓은 판단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2014년 크림반도 사태와 달리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는 직접적인 군사력을 동원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이며, 사실상의 ‘전쟁’에 해당한다. 청와대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원회도 이날 오후 회의 뒤 “러시아가 유엔헌장을 비롯한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독자 제재에는 애써 거리를 두는 정부의 태도를 두고 미국과 러시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다 자칫 정부가 강조해 온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과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아무리 내용 측면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제재를 충실히 이행하려는 의도라고 해도, 독자 제재 발표라는 형식을 택해 스스로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것과는 대미 메시지 차원에서 무게감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절충안은 없다" 美 거센 압박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가 미사일 공격을 받는데도 정부가 여전히 현 상황을 ‘전면전’으로 규정하지 않는 데 대해서도 비판이 제기된다. 외교부는 러시아의 침공 직전인 이날 오전 입장자료를 통해 제재 동참의 뜻을 밝히면서도 전제 조건으로 러시아의 ‘전면전’ 감행을 언급했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가 전면전에 착수했음에도 정부는 상황 규정 자체를 피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전면전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꼭 정의를 내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며 “전면전 상황이 되면 국제사회와 함께 제재 조치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재 동참의 조건으로 전면전을 언급하면서도 왜 현 상황이 전면전인지 판단을 내리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특별군사작전 결정 발표에 이은 일련의 상황은 ‘무력 침공’이 발생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고만 말했다.
앞서 정부는 전날까지만 해도 신북방정책 등을 이유로 “(대러 제재에 동참하기는)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같다”(22일 파리 현지 외교부 당국자)고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날 오전에야 급히 입장을 바꿨다. 이를 두고 불신을 자초할 수 있는 빌미를 스스로 제공했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