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재보선 이어 선거 고비 때마다 꺼냈지만 진정성은 ‘반신반의’
후세대에 물려줄 586의 유산을 고민하는 게 용퇴론의 본질 돼야
송 대표의 ‘결단’으로 1999년 정치권에 등장해 주류를 이뤘던 586세대(5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의 퇴진이 가시화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산발적으로만 맴돌았던 ‘586 용퇴론’이 정치권, 특히 민주당에서 화두가 됐다. ‘83학번’인 김종민 의원이 용퇴론에 불을 붙였다. 김 의원은 1월 2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386 정치가 민주화 운동의 열망을 안고 정치에 뛰어든 지 30년”이라며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면 민생이 좋아지는 게 근대 시민혁명 이후 200년 역사의 예외 없는 법칙이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가 민주주의를 제대로 못한 것”이라고 자성했다.
이어 “정권교체 민심의 뿌리는 정치교체에 대한 절박함이 있다. 민주당은 이 민심에 대답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586 용퇴론에 대해 그는 “정치의 신진대사를 위해 의미는 있다”면서도 “그러나 임명직 안 하는 것만으로 되나. 이 정치를 바꾸지 못할 거 같으면 그만두고 후배들에게 물려주든지, 정치를 계속하려면 이 정치를 확 바꿔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민주당에서 나온 586 용퇴론의 이면에는 대통령 선거에서 질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해석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오차범위 수준에서 접전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 후보의 지지율은 30% 중후반의 박스권을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40%대)에도 미치지 못한다. 김종민 의원이 586 용퇴론을 거론하면서 “정권교체 민심 55% 가운데 10% 이상을 설득해야 한다. 변화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대선정국 수세 몰린 민주당의 반전카드?
586세대 퇴조는 특히 여의도 정치무대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586그룹이 여의도에 등장한 건 2000년 총선을 통해서였다. 그보다 4년 전인 1996년 15대 총선에서 김민석 의원이 31세 나이에 원내 진출에 성공했지만, 일반적으로 이를 586의 등장 시기로 보지는 않는다. 1999년 김대중 정부에서 사면 복권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출신 86세대들이 그해 말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에 대거 등용됐기 때문이다. 임종석(한양대 총학생회장), 송영길(연세대 총학생회장), 이인영(고려대 총학생회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여의도 정치의 주류로 세력화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선거(국회의원 선거 5회, 인천시장 선거 1회)에 나와 모두 당선한 송영길 대표는 국회의원 5선(인천시장 미포함)에 이른다. 정치 경력으로 586은 이미 중진그룹에서도 최고참급 세대가 된 셈이다. 정세균(6선), 이해찬(7선) 의원 정도를 제외하면 당내 중진은 대부분 86세대들이다. 민주당의 586그룹 인사는 “이제 남은 건 국무총리와 국회의장, 대통령뿐”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이번 대선은 586그룹이 전면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다는 의미다. 대선 캠페인의 쌍두마차인 송영길 당 대표와 우상호 중앙선대위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586그룹의 대표 격이다. 캠프 주요 직책에도 586이 넓게 포진해 있다. 오영훈(제주대 87학번) 후보 비서실장, 서영교(이화여대 83학번) 총괄상황실장, 김영진(중앙대 86학번) 총무본부장, 이원욱(고려대 82학번) 조직본부장 등이 있다.
그래서 586 용퇴론은 배수진을 치고 선 민주당 586그룹의 국면전환용 카드 성격이 짙다. 대선과 총선 등 중요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지도부와 주류 계파가 정치적 책임을 지고 2선으로 물러났던 과거 관행에 비춰볼 때 만약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당내에서 불거질 쇄신론의 화살이 586그룹을 향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대선 결과 따라 정치 쇄신 위한 용퇴 요구 커질 수도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은 친노 세력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민주당 주류였던 동교동계와 결별했다. 당내에서 비주류였던 노 전 대통령으로서는 국정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2000년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386그룹이 대거 청와대에 입성해 국정에 참여하고, 여의도에서 쇄신바람을 일으키면서 노 전 대통령을 엄호했다.
자신을 ‘변방 장수’라고 부르는 비주류 정치인에서 대선후보로 자리매김한 이재명 후보가 당선할 경우 노 전 대통령이 시도했던 신진세력 육성을 통한 정계 개편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이 후보는 여의도 정치 경험이 없다. 86세대이긴 해도 학생운동 경험이 없다. 전대협을 중심으로 끈끈한 동지적 관계로 얽혀 있는 민주당 586그룹에서 한발 벗어나 있다. 국정을 뒷받침할 자기만의 친위 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이 후보가 ‘정치교체’ 구호를 들고 나온 것도 이런 배경으로 풀이된다. 직접 586을 겨냥하지 않았지만, 향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할 경우 정치권의 쇄신을 위해 신인을 등용하리란 건 충분히 현실성 있는 시나리오다.
586을 대체할 이재명의 친위 그룹은 70년대생, 90년대 학번, 즉 ‘한총련 세대’가 우선 거론된다. 전대협의 후신인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은 자주·민주·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1990년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96년 연세대 사태로 폭력성이 부각되고, 이어 박홍 전 서강대 총장이 촉발한 주사파(주체사상파) 논쟁이 확산하면서 1998년 대법원 확정판결에 의해 이적단체로 낙인찍혔다. 당시 1997년부터 2001년까지 한총련 활동과 관련해 594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자 중 한총련 대의원(각 대학 총학생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이 절반을 차지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 한총련 합법화와 처벌을 받은 대의원들의 사면·복권 논의가 이뤄졌지만,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정치에 입문한 한총련 세대는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한 채 20여 년간 비주류로 머물러 왔다. 학생운동 선배인 586그룹이 전대협 활동을 정치 입문의 필수 경력으로 인정받았던 것과 정반대다. 민주당 대선 캠프에서 활동 중인 한총련 세대 A씨는 “학생운동 경력을 바탕으로 정치에 입문한 586 선배들이 승승장구하는 동안 한총련 후배들은 숨죽인 채 조연으로 살아왔다. 무대 밖에 있는 후배들의 명예회복에는 소홀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 깊이 배어 있다”고 말했다.
선거 때만 고개 드는 용퇴론, 진정성 의심받아
민주당 586그룹이 스스로 꺼낸 용퇴론의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기류도 만만찮다. 비판적 진영은 대선의 승부처로 꼽히는 중도 확장이 막힌 상황에서 용퇴론이 나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다분히 선거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범여권의 정치컨설팅을 하는 40대 이모씨는 “판세가 우세했다면 용퇴론을 스스로 꺼냈겠느냐”고 반문했다.
용퇴론이 이번에 처음 거론된 건 아니다. 지난해 4·7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도전했던 우상호 의원은 2020년 말 출마 기자회견에서 “서울시장 출마는 저의 마지막 정치적 도전”이라며 “어떤 경우에도 다음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하고 이번 선거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선언해 586 용퇴론에 불을 지폈다. 이후 서울·부산 시장을 국민의힘에 내주며 민주당이 참패한 데 이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2030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당 대표자로 선출되자 민주당 안에서 586 용퇴론이 점화했다. 이원욱 의원은 지난해 6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민주당 주류인 86세대인 우리가 먼저 반성해야 한다. 민주당의 벗이었던 2030세대가 떠난 이유를 직시해야 한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시 용퇴론은 미풍에 그쳤다. 선거가 끝난 뒤 우 의원의 용퇴 선언에 동참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야무야되는 듯하다가 대선이 임박하자 다시금 용퇴론을 꺼내 들었다. 회심의 승부수로 여겼던 송 대표의 용퇴 선언이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소멸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으로 풀이된다. 용퇴론을 처음 꺼냈던 우 의원이 민주당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은 것도 진정성을 의심케한 계기로 작용한다. 게다가 송 대표와 우 의원의 불출마 선언 이후 동참하는 이가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586의 간판 격인 임종석 전 의원을 비롯해 당내 586그룹의 일원 중 누구도 추가로 용퇴론을 거론하는 이는 아직 없는 상황이다.
파급력이 기대에 못 미친 것을 의식했는지 우 의원은 자신과 송 대표의 총선 불출마 선언에 대해 “다른 의원들에게 강요나 확산하려는 목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1월 27일 선대위 총괄본부장으로 임명된 날 그는 “대선에서 지느냐 이기느냐 절체절명의 상황이라서 우리 더불어민주당 구성원 누구도 개인의 거취나 자리 욕심을 부릴 때가 아니다”라며 “당 대표자가 차기 불출마 선언을 할 정도로 절박하고 절실한 상황이라 오로지 모든 관심은 대선 승리로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상민(충남대 81학번) 의원은 같은 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586을 싸잡아서 책임을 물으면 달라지느냐? 책임을 물으려면 옥석을 가려서 책임의 소재와 경중에 따라 물어야 한다”며 “586 용퇴는 어떤 앙갚음이나 화풀이 용도로 쓰는 것밖에 의미가 없다”고 반발했다. 이 의원은 용퇴론이 “두루뭉술하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이 된 사람들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고, 오히려 트러블과 갈등만 크게 유발해 소모적으로 흐를 수 있다”고 부연했다. 대선 국면에서 용퇴론을 직접 거론했던 김용민(서울대 83학번) 의원도 MBC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의원도 586 용퇴에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개인의 용퇴 문제가 핵심이 아니고, 제도를 용퇴시키기 위해 힘을 합치자는 것”이라며 발을 빼는 듯한 뉘앙스를 내비쳤다.
6·13 지방선거는 586 용퇴론 무풍지대
대선 직후인 6월 13일에 치러지는 지방선거는 오히려 586들의 각축장이 될 분위기다. 주요 지역에 민주당 586그룹이 출마를 준비 중이다. 경기도지사 선거에는 염태영(서울대 80학번) 수원특례시장과 5선인 안민석(서울대 82학번) 의원이 출마를 준비 중이다. 강원도지사에는 이광재(연세대 83학번) 의원과 김우영(성균관대 88학번)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광주시장에는 강기정(전남대 82학번) 전 의원이 후보군에 올라 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586 용퇴론은 여의도 정치용”이라는 뼈 있는 농담도 나온다.
대선 이후 586그룹이 순순히 용퇴론에 응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기든 지든 용퇴론에 직면할 것은 분명하겠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을 거란 전망이다. 우선 국민의힘이 대선에 승리할 경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적폐 청산의 칼날을 들이댈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민주당이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172석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의회 권력에 의존하는 것뿐이다. 정권과 대립이 격화할 경우 용퇴론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
또 용퇴를 논하기엔 국회의원 임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점도 문제다. 용퇴론이 재점화하더라도 그 시기는 2024년 총선을 앞둔 시점이 점쳐진다. 민주당이 입법 발의한 ‘동일지역구 국회의원 연속 3선 초과 금지 제도화’에 국민의힘이 호응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대선용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설령 민주당 내에서 원칙으로 자리 잡더라도 지역구를 바꿔서 출마하는 식으로 우회할 수도 있다. 민주당의 한 원외 인사는 “지금은 대선 국면이어서 드러내지 못하지만, 정치 생명이 좌우된 일인데 현역 의원들이 순순히 기득권을 양보할 거란 생각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
586그룹 안에서도 불만이 감지된다. 개인의 정치활동 자유를 집단으로 묶으려는 발상 자체가 구시대적이란 지적이 우선 나온다. 원외에서 활동하는 민주당의 한 86세대 인사는 586 용퇴론을 ‘전대협 문화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다. 그의 설명이다. “전대협 세대는 학생운동을 통해 ‘함께 살고 함께 죽는다’는 연대의식, 조직화, 집단적 규율 문화가 강하다. 몇 사람의 불출마 결정을 586그룹 전체의 결심으로 확대하려는 발상 자체가 이미 구시대적이다.”
586그룹을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누가 대표성을 갖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586은 넓게 보면 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60년대생을 의미한다. 더 넓히면 대학생 경험과 상관없이 60년대에 태어난 전후 세대를 통칭하기도 한다. 정치적 의미로는 86세대를, 민주당으로 범위를 좁히면 8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했던 ‘전대협 세대’를 지칭한다. 범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용퇴 대상이 달라진다.
“집단적 규율 문화에 익숙한 ‘전대협’식 발상” 지적도
이처럼 변명의 여지가 있다 해도 586의 퇴조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데 이견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다만 세대교체론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시기가 대선 직후냐 아니냐의 시차만 있을 뿐이다. 청년세대의 기성세대 용퇴 요구는 기득권 교체기에 늘 반복돼왔다. 지금의 586들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 등장했던 시기도 2030 청년 시절이었다는 걸 돌아보면 장년층의 문턱에 선 그들이 용퇴론에 직면한 건 당연한 순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퇴론을 단순히 세대 간 권력 다툼으로 비화할 게 아니라 586이 후세대에 어떤 유산을 물려줄 것이냐는 논의로 발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586 이전의 산업화 세대가 고성장의 풍요를 물려줬듯이 제도의 민주화를 쟁취해낸 586이 후세대에 물려줄 유산을 고민해야 할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캠프에서 활동하는 ‘MZ세대’ B씨의 말이다. “민주화는 586의 훈장이 아니다. 청년들은 586의 학생운동 시절 낭만과 무용담에 관심 없다. 그렇게 얻은 민주화로 더 풍요롭고 공정한 세상을 만들어주길 바라고 있다. 아니면 그 역할을 다음 세대에게 넘기라는 것, 용퇴론의 본질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