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송호근의 세사필담] 두 개의 지옥 문, 오미크론 대선

중앙일보

입력 2022.02.2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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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2년 전 4월, 벚꽃 총선을 기억한다. 37개 비례정당이 늘어선 투표용지를 들고 망연자실했던 모습을. 코로나 1파가 가라앉던 시기였음에도 시민들의 가슴엔 공포심이 가득찼다. 하루 확진자 100명, 요즘 같으면 마스크를 벗어 던져도 될만한 숫자였다. 2년이 지났다. 하루 확진자 10만 명, 누적 사망자가 1만 명을 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다시 투표행렬에 서야 한다. 전파력이 강한 그놈의 활공을 피해 도장을 꾹 눌러야 한다. 투표용지는 2년 전의 그 망연자실함을 증폭한다. 이번에는 정치공포도 겹쳤다. 창궐하는 오미크론이 생지옥인 것처럼 권력찬탈 모략과 비루한 언사로 얼룩진 대선은 또 다른 지옥이다. 두 개의 지옥문을 열어야 한다.
 
K방역의 성공신화는 이미 무너졌다. 대량감염 앞에 중앙방역대책본부는 횡설수설이고, 정은경 질병관리청장도 쑥스런 메시지를 내놓고 멋쩍어할 뿐이다. 국민일상회복위원회 민간위원장은 오미크론이 반갑다고 했다. 치사율이 낮아 결국 독감 수준으로 격하될 것이기에. 하루 위중증 환자가 400명을 넘었다. 연말까지 뜻밖의 죽음을 맞을 수천 명, 스텔스 감염 공포에 떠는 국민, 팬데믹 융단폭격에 울부짖는 자영업자들을 안심시킬 대책은 무엇인가? 반갑다고? 방역을 완화한다고? 투표행렬에 나서라고? 공포를 다스릴 마음의 방공호라도 만들어줘야 제대로 된 정부 아닌가.
오미크론 창궐 와중에 투표해야
사람 죽는데 공약이 무슨 소용
망가진 한국정치에 얹힐 대통령
4당 특단의 조치가 협치의 시작
 
오미크론이 에어로졸 전파력 최강자임을 누구나 다 안다. 점액 코팅된 에어로졸이 바람을 타면 금세 옆방이나 건물 전체로 퍼진다고 했다. 게다가 미검사자와 무증상자를 합하면 확진자가 4배에 달한단다. 감염위험에 노출된 무정부 상태다. 3월 초 확진자 최대 36만 명, 사망자 680명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도 있다. 대체 어쩌란 말이냐?
 
오미크론의 출현 불과 두 달 사이, K방역은 망가졌다. 정부가 뽐내던 3T는 무용지물이 됐다. 요양원, 양로원, 생활치료센터 등 집단격리 방식은 신종 고려장에 다름 아니다. QR코드를 열심히 찍어봐야 오미크론의 활동성은 방역패스 통제망을 뚫는다. 자영업자와 영세업자에게 손실보상금을 줘도 파산을 독촉하는 저승사자가 점포 문 앞에 대기 중이다. ‘방역의 정치화’에 눈독 들인 정부의 오락가락 행보는 이미 망가진 K방역 안에서 맴돌 뿐이다. 새로운 게 없다.
 
망가진 것이 또 있다. 대선판이 이토록 오염된 것, 유력 후보들의 면면이 극도로 미흡한 것 모두 한국정치가 망가졌다는 뚜렷한 징표다. 한국정치는 이미 부도를 내고 있었다.


유능한 정치인을 무차별 저격했고, 경제, 사회, 문화의 무한잠재력을 갉아먹었다. 서킷브레이커가 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의회정치는 일찍 파산을 선고해야 옳았다. ‘다당제-협의제’는 3김 시대 이후로 자취를 감췄다. 586세대가 약진한 2004년 총선 이래 정치전선은 정적을 섬멸하는 백병전이 됐고, 정당은 권력쟁취와 현실호도의 사령부다. 정책실패는 사전에 없다. 수 틀리면 사법부로 몰려간다. 2019년 공수처법 제정 폭력사태로 국회의원 109명이 고발됐다. 정치의 사법화,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대통령을 새로 뽑아도 망가진 정치판에 얹힌다. 지옥의 재현이다.
 
박상훈 교수는 거대 여당을 대통령의 ‘확장된 팔’로 규정했다. 권력과 특권의 약탈 전쟁에서 무소불위의 팔은 정치인들에겐 명검이다. 대체 백병전에서 얼마나 많이 살해됐길래 외부인을 후보로 영입해야 했을까? 그들이 등 떼밀어 나선 대선후보가 나라와 민생을 제대로 살려낼까? 또다시 파당의 대리인을 뽑는 참담한 지옥문이 열린다.
 
유세가 그림자놀이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말바꾸기, 갈라치기의 명수가 외치는 ‘대타협 국민통합’은 낯 뜨겁다. 내일을 바꾼다고 뚝심있게 밀고 나가다 치명적 실수를 범할 듯 아슬아슬한 후보도 있다. 깨끗하지만 어눌한 후보는 뭔가를 어눌하게 추진하다 노회한 정치인들에게 휘말릴 것 같다. 그러니 ‘망가진 한국정치의 전면 리셋’, 이게 공약 1호여야 한다. 의회와 사법부 원위치, 당정분리, 대권 축소, 연정이든 내각제든 전면 도입, 그 지긋지긋한 싸움을 중단하고 협치로 변신하는 것. 대한민국이 요청하는 절박한 ‘공통 공약’ 헌장이다.
 
두 개의 지옥 문을 보름 앞두고 특단의 비상조치가 필요하다. 오미크론을 물리칠 참신한 합의, 이게 협치의 시험대이기도 한다. 사람이 죽는데 공약이 무슨 소용인가. 4당이 합의해 정부에 건의해 달라.  
 
1. 중환자 관리 의료체계의 재정비, 2. 확진자 치료 병의원 확대지정, 3. 자가진단키트를 건강보험에 적용해 100원에 판매토록 하는 것. 한 박스 1만2000원, 누가 사랴. 1만9000원 재택치료패키지도 건강보험에 넣자. 4. 하루 1회 검사한 진단키트를 방역패스로 대체. 한국의 첨단 IT기술을 활용하면 영업시간에도 약간 숨통을 틔울 수 있겠다. 5. 거리두기는 그대로, 힘들게 학습한 자율통제로의 전환. 오미크론 공포가 한국을 집어삼킬 3월 말까지 집단의지를 발휘해보자. 이것도 못 하면 협치, 대타협이란 말은 꺼내지도 말라. 정치가 곧 집단지성임을 보여 달라.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