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메달을 딴 선수는 한국의 박시헌, 울음을 터뜨린 선수는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였다. 박시헌은 2라운드에 스탠딩 다운을 당했다. 복싱 전문가가 경기 녹화 영상을 분석해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존스는 303회 주먹을 날려 86회의 유효 타격에 성공했다. 박시헌은 188회에 32회였다. 당시 외신들은 ‘최악의 판정’이라고 비판했다. 다음 날 한국 신문에 〈“마지막 '금' 너무했다” 관중·시민 비난〉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그래도 지금의 중국과는 달랐다).
올림픽 총력, 우리도 88때 그랬다
두려운 건 우리 미래가 닮는 것
'소중화' 길 역주행은 꼭 막아야
의혹은 그렇게 묻혔지만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안다. 매수까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융숭한 대접은 했을 것을. 대기업 사주들이 맡았던 각 경기 연맹 회장의 역할 중 하나가 오랫동안 그것이었다. 어렵사리 올림픽 개최국이 됐고, 금메달 수가 국력을 보여준다고 철석같이 믿던 시절이었다.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국위 선양. 한 세대 전의 그 역사를 요즘 베이징 겨울올림픽을 통해 다시 떠올린다. 중국,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너는 나의 과거’다.
베이징 겨울올림픽 사태는 약간의 분노와 씁쓸함 유발에 그친다. 진짜 무섭고 두려운 것은 중국이 우리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소중화(小中華)’의 길로 역주행하는 듯한 모습이 우리 사회에 꾸준히 나타났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라는 초헌법적 기관이 생겨나 범죄 혐의가 없는 민간인의 통신정보를 수집한다. 중국의 공안(公安)이 생각난다. 며칠 전에는 방송사 PD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막 대하고, 이 카드로 저 카드 막고”라는 말을 했다가 방송에서 하차해야만 했다. 연일 친정부적 편파 발언을 하는 다른 라디오 방송 진행자는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거액의 출연료를 꼬박꼬박 챙기고 있는데도 그렇다. 중국에서처럼 사람이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지지는 않아 다행스럽다.
2019년 11월, 한국 정부는 동해에서 발견된 배에 타고 있던 북한 주민 두 명을 북한으로 강제 추방했다. 선박 나포에서 판문점을 거친 탈북인 송환까지 딱 5일이 걸렸다. 곧바로 돌려보낸 것에 대해 정부는 그들이 북한에서 흉악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확보한 범죄의 증거는 없었다. 그들의 생사 여부는 모른다. 훗날 반드시 과정과 이유가 규명돼야 할 한국 정부의 반인륜적 행위다. 목숨 걸고 국경을 넘은 탈북인을 중국 정부는 붙잡아 송환하기에 바쁘다. 우리가 어느새 그걸 따라 하고 있다.
중국을 닮아가는 우리가 무섭다. 그래서 중국에 더 예민하다. 그것을 ‘보수화’라고 규정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중국처럼 시민의 자유가 억압되고 인권 침해가 빈번히 일어나는 나라가 돼 가는 것이, 그리고 그런 상황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이 진보적 태도라는 말인가. 이런 가치 전도의 억지가 퍼지는 것도 퇴행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