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 향한 태종 이방원 원한이, '반항아' 홍길동 만들었다 [역발상]

중앙일보

입력 2022.02.04 17:03

수정 2022.02.04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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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극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사진 KBS]

"어머니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원래 자식의 앞길을 열어주는 게 어미다."
KBS 사극 '태종 이방원'에서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가 주고받는 대화. 이성계가 둘째부인인 강씨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우기로 하자, 이에 분노한 이방원이 강씨에게 따지는 장면입니다. 
첫째부인 한씨의 소생인 이방원은 둘째 부인 강씨의 아들인 서자(庶子) 방석에게 세자를 빼앗긴다는 것에 견디기 어려운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은 '서얼금고법'이라는 법을 제정해 과거의 문과(대과) 시험은 오직 적자만 응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 청요직을 비롯해 고위직에 오르려면 반드시 대과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소과 시험만으로는 하위직을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태종이 이런 법을 제정한 것이 개인사에 얽힌 원한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훗날 강씨의 무덤인 정릉에 있던 석물과 병풍석 들을 이용해 청계천 광통교를 만들었을 정도로 악감정을 풀지 못했습니다. 
 

KBS 사극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사진 KBS]

 
원소와 홍길동의 처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홍길동의 탄식입니다.  


광해군 때 허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은 1433년 조선 (세종 15년) 좌의정 홍상직과 여종 춘섬 사이에서 태여난 홍길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 났으나, 모친의 신분적 한계 때문에 뜻을 펴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결국 율도국(栗島國)이라는 이상적 국가를 세운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간행된 경판본과 전주에서 간행된 완판본을 비롯해 여러 이본(異本)들이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은 그만큼 이 책이 조선시대에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흔히 '서얼(庶孼)'이라고 하는 것은 서자(庶子)와 얼자(孼子)의 합성어입니다. 모두 첩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지만, 신분이 엄연히 다릅니다. 서자(庶子)와 서녀(庶女)는 양인첩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입니다. 반면에 천민인 첩이 낳은 아들을 얼자(孼子), 딸을 얼녀(孽女)라고 불렀습니다. 홍길동의 어머니는 여종이었으니 얼자에 해당합니다.    
 

신동헌 화백의 '홍길동' [중앙포토]

다소 쌩뚱맞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홍길동의 처지를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원소를 비교해볼까 합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적 배경에서 활동했지만, 매우 유사한 공통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 천한 종놈"
『삼국지연의』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아마도 익숙한 대사입니다. 원술이 자신의 사촌형 원소를 경멸하며 부르는 말이죠. 원소는 '사세삼공(四世三公·4대가 모두 삼공의 직위를 얻음)'의 명문가 출신이지만 치명적 신분의 약점이 있엇습니다. 그것은 원소의 모친이 천민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원소와 홍길동은 똑같은 처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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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가 태어난 한(漢)나라는 중국 왕조에서 처음으로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공식화했던 나라입니다. 실력보다도 예와 혈통이 중시받았던 시대입니다. 그만큼 이전의 전국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신분질서에 대한 개념이 사회적으로 넓고 깊게 뿌리 내렸습니다.
그런 시대에서 모친이 천민 출신인 원소는 많은 설움을 받고 자랐습니다. 사촌동생인 원술에게도 '천한 종놈'이라는 경멸을 받았으니까요.
 
처지를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혁명을 일으켜 세상을 뒤엎든가, 철저하게 순응해 자신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원소가 택한 방식은 후자였습니다.
 

소설가 이문열의 첫 장편 소설 『사람의 아들』(오른쪽)과 평역 『삼국지』. [사진 민음사]

원소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낳아준 생모 외에 아버지 원봉의 정식 부인입니다. 그런데 이 적모(嫡母·부친의 정실 부인)가 사망하자 원소는 아버지의 고향 여남으로 내려가 삼년상을 지냅니다. 이어 자신이 어렸을 때 죽은 친부 원성의 3년상을 추가로 치릅니다. (족보가 복잡합니다. 원봉은 원성의 동생이고, 원소의 삼촌이었습니다. 그런데 형 원성이 죽자 원봉은 조카 원소를 입양했습니다.)
 
유교적 덕목이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던 한나라 사회에서 이 6년상은 당대 큰 화제가 됐습니다. 한나라의 내로라하는 셀럽들이 이에 대해 호평하고, 6년상을 치르고 있는 원소를 찾아와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생각해보면 이재명·윤석열 같은 대선후보들이 찾아와 격려하고, 연예인들이 인스타나 페이스북에 올리고, '유키즈' 같은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는 식이겠죠.  
 

게임 '토탈워 삼국지'의 원소 [유튜브 캡쳐]

원소는 이를 통해 전국적인 명사가 됐고, 한나라의 정계에서 기대받는 유망주로 떠오릅니다. 또한 명문가인 원씨 일가의 대표 주자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홍길동의 선택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는 집을 나와 활빈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공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는 활빈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부패한 절을 혼내주면서 종량허통, 즉 서얼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국가에 공식 요구합니다. 체제에 적극 순응하는 '모범생'의 길보다는 '반항아'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죠.
 
하필 세종의 시대에…  
홍길동은 세종 때 태어나 문종 시기에 활동합니다. 광해군 때 활동한 허균이 하필 이 시기를 홍길동의 시대로 선택한 것은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고려와 조선 초까지만 해도 서자들의 지위는 크게 낮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태종이 서얼금고법을 제정하면서 서얼들의 사회적 지위는 많이 하락합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조선에서 대과 시험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은 큰 제약이 됐습니다. 
 
그래도 태종은 종부법(從父法)이라고 해서 아버지가 양인일 경우엔 그 자식도 양인으로 규정하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가 천민인 얼자(孼子)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서자(庶子)하고는 차이가 없으니 그래도 하위직 공무원은 할 수 있던 셈이죠. 사실 이 정도만 됐어도 홍길동이 활빈당이라는 도적 무리를 만들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세종대왕 [중앙포토]

그런데 문제는 세종 시대에 이 종부법이 종모법(從母法)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정해지기 때문에 홍길동은 천민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이제는 집안에서도 첩의 아들이라고 차별받는데다가 과거(소과)에도 응시할 수 없어 공무원도 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죠. 공무원은 지금도 선망의 직업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더했습니다. 공무원 응시 자격 박탈이라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좌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중의 신분적 제약을 안게 된 홍길동이 극단적인 방식을 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왜 광해군 때였을까
 
허균이 『홍길동전』을 쓴 광해군 때는 임진왜란을 겪은 뒤입니다. 조선 지도층의 무능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분제가 더 강화되기도 한 시기입니다. 
그것은 지방의 양반 재지사족들이 의병들을 지휘하고, 전후 복구사업을 지휘하면서 발언권이나 영향력이 오히려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영화 '광해'의 한 장면 [사진 네이버영화]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광해군 5년 서양갑, 박응서 등의 칠서지변(七庶之變)이 일어난 것도 이 무렵입니다. 고위층의 서자 7명이 벌인 일종의 반체제 사건으로, 갈수록 위축되는 서자들의 입지와 이와 관련해 아무런 개선이 보이지 않는 광해군 정권에 대한 불만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난 사건입니다.
 
홍길동은 정말 혁명을 꿈꿨나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홍길동전』은 여종의 아들이 서얼허통을 요구하고, 국가 공권력을 농락한 뒤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내용 때문에 혁명적이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 이 책이 어떻게 조선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창작 가무극 '칠서'. [사진 서울예술단]

일부 연구자들은 홍길동이 진짜로 체제를 흔드는 혁명을 꿈꾼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홍 판서의 애첩 초란과 특재의 살해 음모 때문에 어쩔 수없이 집을 떠나 도적떼(활빈당)를 이끌게 되지만, 이들의 활동이 유교적 덕목과 전혀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활빈당의 표적은 어디까지나 부당하게 징수한 탐관오리나, 백성의 고혈을 착취하는 사찰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는 '호부호형(呼父呼兄)'을 요청하면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이죠. 훗날 그는 율도국을 세운 뒤에도 부친의 묘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치르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홍길동이 내세운 가장 큰 명분, '종량(從良)'과 '허통(許通)'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량'은 천인이 양인으로 인정받는 것, 다시 말해 아버지가 양반이니 자신도 같은 신분으로 대우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종 때 추진한 '종부법'으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허통'은 태종이 막았던 과거 시험 응시자격을 다시 부여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홍길동이 내세우는 것은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편입이지, 사회적 모순 타파나 체제 붕괴하고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훗날 송시열이나 박세채 같은 노론의 주요 인사들조차도 '허통'이 필요하다고 건의할 정도로 홍길동이 내세우는 주장은 당시 사회 지도층에게도 어느 정도 공감을 받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전체 내용이 완벽하게 갖춰진 완판 '홍길동전'의 원간본(초간본) 2종이 처음으로 발굴됐다. 홍길동전은 서울에서 인쇄된 경판본(京板本)을 비롯해 안성판본(安城板本), 완판본(完板本), 필사본 등 네 종류가 있는데, 완판본은 전북 전주에서 간행된 책을 말한다. 원간본(原刊本)은 여러 차례 출간된 책 중 맨 처음 간행된 것이다. 2021년 2월 19일 유춘동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인천과 강릉에 거주하는 개인들이 완판 '홍길동전' 원간본 36장본과 35장본을 각각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해 확인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완판 '홍길동전' 원간본 36장본. [연합뉴스]

이러한 분위기는 조선 순조 때 공노비 해방 및 서얼허통을 실시하면서 어느 정도 해소 됩니다. 하지만 철종 때도 영남의 서얼들이 『규사(葵史)』라는 책을 내 호소하는 등 물론 사회적으로 완전히 정착되는 데는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규사』의 규(葵)는 해바라기를 뜻하는데 국가와 가문에 대한 자신들의 충성심을 해바라기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들은 양사언, 이덕무 등 서얼 출신의 유명인사 56명의 행적을 남겨 자신들 역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것을 호소했습니다. 
서얼이라는 신분이 공식적으로 해소되는 것은 1894년 갑오경장 때에 이르러서입니다. 
 
허균이 『홍길동전』 속에서 남기고 싶은 진짜 이야기가 무엇이었든지, 서얼 문제가 조선에 남긴 상처는 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족쇄에 묶여 사회에서 활동할 기회를 박탈당했으니까요. 
지금은 어떨까요. 물론 조선처럼 서얼을 차별하는 법률은 없지만 사회적 양극화, 다문화 가정 등으로 또 다른 비공식적 '서얼'을 만들게 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