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8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일부다. 그해 여름 이 신문은 13회에 걸쳐 결혼식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서양식 예복 대신 ‘백의(白衣)’를 입고 주례 없이 지인들 앞에서 결혼 배경만 간단히 소개하고 반지만 교환하라고 제안했다. 결혼식 음식도 경제적 부담을 준다며 도시락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이른바 ‘작은 결혼식’인 셈이다.
당시 결혼식의 어색한 풍경, 즉 ‘서양+동양’이라는 두 문화의 혼합은 요즘 결혼식에서도 여전히 보인다. 본식은 웨딩드레스 등을 입고 서양식으로 치른 뒤, 한복으로 갈아입고 폐백실로 향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내놓은 『두 가지 스타일의 한국 결혼식-전통과 현대의 이중주』는 이런 결혼식 모습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됐는지를 추적한 학술 교양서다.
조선 시대 사대부 문중의 혼례는 신붓집에서 치렀다. 처가에서 자녀를 낳고 키우다가 아이가 자라면 신랑 집으로 돌아가는 게 전통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율곡 이이도 외가인 강릉에서 자랐다. 그래서 결혼을 ‘장가(丈家·처가)간다’고 했다. 안정복은 이를 고구려부터의 ‘고례’라고 강조했다. 재산은 아들·딸에게 균등 상속했고, 조상 제사도 아들·딸이 번갈아 지냈다. 즉 아들·딸의 지위가 거의 동등했기 때문에 중국식 혼례 문화가 맞지 않았다. 조선 후기는 중국식 풍속을 따르는 것이 최첨단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왕실부터 앞장서서 중국식을 따랐고, 이는 곧 민간으로 퍼졌다. 안정복은 어중간한 지점에서 타협했다. 사위를 맞아들여 함께 기거하다가 2년 뒤 시가로 딸을 보냈다.
잘못 전해진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꽃을 뿌리는 풍습이 오색종이나 줄을 던지는 식으로 변형됐고, 심한 경우 구두나 양말을 뿌리는 광경도 연출됐다고 한다. 서양식 결혼 문화의 도입은 결혼식 비용을 늘리는 요인이 됐다. 조선총독부 학무당국은 1933년 ‘의례의 준칙 제정에 관한 사항’을 발표하면서 “현하 조선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혼상 등에 대한 의례에 걸쳐있는 사항이 극도로 많아서 무용의 시간을 버리고 막대한 비용을 투여하여 가계가 기울고 가산이 파산되는 폐해가 적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지금의 결혼식 틀이 완성된 건 1969년 3월 5일 박정희 정부가 발표한 ‘가정의례준칙’을 통해서다. 이에 따라 결혼식 순서는 ①개시 ②신랑 입장 ③신부 입장 ④신랑 신부 맞절 ⑤신랑 신부 서약 ⑥예물 증정 ⑦성혼선언문 낭독 ⑧주례사 ⑨양가 대표 인사 ⑩신랑 신부 인사 ⑪신랑 신부 퇴장 ⑫폐식 순으로 구성된다.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순시에서 “강제 규정을 만들어서라도 쓸데없는 낭비를 막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정부는 1973년 6월부터 약혼식 폐지, 답례품 및 피로연 금지, 화환이나 테이프 사용 금지 등을 ‘가정의례준칙’에 추가했다. 위반하면 5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