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사전적 정의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이다. ‘옛(古) 문헌(典)’이라는 필요조건을 넘어 ‘가치’라는 충분조건까지 갖춘 것을 우리는 고전이라 한다. 그러니까 고전은 절대로 ‘낡은 것’이 아니라 ‘옛것이되 오늘의 것’으로서, 더 나아가 미래에도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것의 총칭이다.
“고전의 힘 알고 있다”는 스타배우
정신적·문화적 보고로서의 고전
우리 시대는 어떤 고전을 남길까
정신적·문화적 보고로서의 고전
우리 시대는 어떤 고전을 남길까
그런데 고전이라 일컫는 거의 모든 것은 분야를 막론하고 대체로 진지하고 심각하다. 희극조차도 그냥 우습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반추해야 할 것들로 가득하니 읽고 또 읽어도 어렵다. 보고 또 보아도, 듣고 또 들어도 따분하고 지루한 것이 고전이다. 전문가의 설명을 접하면 대충 알 것도 같지만, 그만큼 시간을 투자할 여유는 없다.
그래서 며칠에 걸쳐 두꺼운 책을 읽고 사색하기보다는 자투리 시간에 웹툰을 보고, 한 시간 내외의 교향곡을 집중해 듣기보다는 3분 내외의 가요를 듣는다. 극단적인 예로, 자기소개서에 쓴 감명 깊었던 책에 대하여 심층 질문을 던지자 머뭇거리던 끝에 결국 이렇게 실토한 수험생도 있었다. “사실은 요약본을 읽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도서관을 찾고 때로 원서 한 권을 구하기까지 몇 달을 기다려야 했던 시절과 1~2초 이내에 필요한 모든 정보와 원하는 콘텐트를 눈앞에 펼칠 수 있는 오늘날의 지적·문화적 향유 양태가 같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려 애써보지만, 그래도 남는 의구심 하나. 지금 우리가 만들고 누리는 문화적 소산이 현재에 소비되는 것을 넘어 미래의 고전으로 과연 얼마나 남을 수 있을까.
1913년 5월 29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큰 소동이 있었다. 러시아 발레단의 ‘봄의 제전’ 공연 중 일부 관중이 참다못해 고성과 야유를 퍼부었다. 박절적 규칙성을 회피(arhythmic)한 서주, 예측 불가능한(하지만 거시적 측면의 질서를 구축한) 악센트, 포효하는 듯한 불협화 등 당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도발적 작품의 작곡가는 다름 아닌 스트라빈스키(1882~1971). 이 충격적인 음악을 작곡한 지 불과 7년 후, 스트라빈스키는 돌연 신고전주의 사조에 동참한다. 신고전주의의 슬로건은 이렇다. ‘바흐로 돌아가자.’ 당대의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가 난데없이 200여 년 전의 정신으로 회귀한 이유가 무엇일까.
일본인들이 ‘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을 만큼 서양음악에서 바흐의 음악은 정신적·기법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베토벤은 이렇게 말했다. “시냇물(=Bach)이라니. 그는 바다라 불려야 마땅하다.” 브람스는 “바흐를 공부하라.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찾을 것이다”라고 했고, 구노는 “바흐 이후의 모든 음악을 잃어버린다 해도 바흐의 음악을 토대로 그것을 재건할 수 있다”라고까지 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고전의 힘이고 고전의 위대함이다. 고전은 시냇물이 아니라 바다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잃어도 그것을 토대로 재건할 수 있는 정신적·문화적 보고(寶庫)다.
고칼로리 식품을 건강의 적으로 여겨야 할 만큼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문화적 콘텐트든 불과 몇 분 만에 눈앞에 펼쳐 볼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도래했지만, 묵직한 고전은 더더욱 외면받고 가벼운 놀잇거리는 나날이 주목받는다. 그것이 뭐 어떻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한 삶을 진정 풍요로운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시대는 어떤 정신적·문화적 소산을 남길까. 놀잇감뿐만 아니라 고전으로 자리매김할 만한 그 무엇이 싹을 틔우고 자라날 토양을 마련하는 것 또한 후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 중 하나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