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1일 공개한 '부여 응평리 석실묘 긴급 발굴조사 보고서'에서 "석실묘의 위계는 중간 정도에서 비교적 높은 단계이며, 피장자는 지방관료 내지는 수장층이었을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응평리 석실묘는 지난해 4월 농지였던 이 지역의 경지 정리 과정에서 발견됐다. 도굴 흔적이 없는데다가 하나의 무덤 안 에서 두 개의 목관과 함께 인골이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되어 큰 관심을 모았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6월 긴급발굴조사를 통해 보존조치했다.
부장품은 거의 없어, 왜?
이에 대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김환희 연구사는 "백제 사비기(수도를 사비로 천도한 뒤 백제 멸망까지·538~660년)부터는 부장품을 많이 넣지 않는 박장(薄葬) 풍습이 유행했다"며 "불교의 영향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앞서 인근 부여의 송국리나 송학리 등에서도 도굴되지 않았지만 부장품이 거의 없는 무덤이 발견됐다.
또, 경주에 있는 신라의 전 효소왕릉(傳孝昭王陵·효소왕의 무덤으로 추정)도 비록 도굴되기는 했지만, 부장품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식 화장을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효소왕(692∼702)은 삼국 통일 이후인 7세기 말 즉위했으며, 이 시기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다.
부부일까? 아닐까?
다만 무덤의 조성 시기는 구조적 특징이나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등을 바탕으로 6세기 말에 1차로 사람을 묻은 뒤 7세기 초에 추가로 장례를 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시기는 백제에서 위덕왕(554~598), 혜왕(598~599), 법왕(599~600), 무왕(600~641)이 재위한 시기다. 혜왕과 법왕 때는 1년마다 왕위가 바뀌는 등 백제가 극심한 혼란에 직면했던 시기다.
관료? 씨족의 수장?
연구소 측은 "조사 지역에서는 1기의 고분이 확인됐을 뿐이지만, 구릉의 동남편 가장자리에 석실묘가 위치한 만큼 구릉 서편이나 위쪽에 더 많은 고분이 자리할 가능성이 있다"며 "만약 응평리 석실묘 주변으로 더 많은 고분이 확인되어 군집분의 양상을 보인다면 도성 거주민의 매장지 중 하나이며 특정 씨족의 묘역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발간된 보고서는 전국의 박물관·대학교 도서관 등 관련 기관에 배포되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