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구로구의 대림동과 베이징 차오양(朝陽)구의 왕징(望京)은 한·중 수교 30년 세월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건대입구 등 중국풍을 느낄 수 있는 거리도 늘어나고 있다. 전통적인 차이나타운이 있는 인천 외에 부산 초량동(부산역 맞은편)에도 차이나타운이 조성됐고 대구 등지에 거주하는 중국인도 늘어났다. 비자 면제로 중국 관광객이 급유입된 제주도의 한 거리 이름은 중국 의약회사 바오젠(保健)그룹의 투자 기념으로 한때 ‘바오젠 거리’로 명명됐다.
베이징의 한국인들은 서우두(首都)공항과 가까운 왕징에 터를 잡았다. 1996년 왕징뉴타운(望京新城)이 들어서면서 현지 사업가와 자영업자, 기업 주재원과 외교관, 유학생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고급 아파트와 입시 학원, 한국 식당과 사우나, 부동산 등 편의시설이 들어섰다.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이 150곳, 거주 한국인은 재중 한국인 전체의 절반 가까운 12만 명에 달했다.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왕징에 거주하게 된 부인들은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생활했다.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라도 생활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집값이 올라가며 왕징은 ‘베이징의 강남’ 같은 위상이 됐다. 현지 중국인 부자들은 ‘일솜씨가 야무지다’며 왕징에 사는 한국 부인들을 가사도우미로 쓰기도 했다.
베이징의 유명 대학교가 밀집해 서울의 홍대·신촌 같은 우다오커우(五道口)엔 밤마다 한국인 유학생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이 돌아다녔다. 톈진(天津)과 상하이(上海), 산둥(山東)성의 칭다오(靑島), 웨이하이(威海), 옌타이(煙台)에도 비즈니스와 유학 등 이유로 한국인이 모여들었다.
30년 동안 양국 간 관광객 수가 급증하고 대중문화가 급속히 스며들면서 두 나라 사이의 생활풍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의 젊은 여성들은 ‘한국풍’이라고 부르며 한국 의상 스타일에 빠졌다. 서울 동대문에서 옷을 떼다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廣州)에서 파는 한국 젊은이들이 생겨났다. 한국인들은 자장면, 탕수육 같은 ‘한국식 중식’을 탈피해 중국 현지 음식을 즐기기 시작했다. 훠궈와 양꼬치 전문점이 속속 들어섰다. 2010년대 중반부턴 ‘마라(麻辣)’로 불리는, 은은히 혀를 아리게 만드는 중국식 매운맛에 많은 한국인이 중독됐다. 마라탕, 마라샹궈, 마라룽샤가 친숙한 요리가 됐다. 상당수 중국인들은 ‘파오차이(泡菜)’라고 부른 한국식 김치 담그기를 시도했다. 대부분은 젓갈 넣는 법을 몰라 실패했다. ‘한쥐(韓劇)’로 부르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의 등산 문화를 신기해하기도 했다. 재중 한국인들은 이윤당(颐潤堂) 같은 가성비 최고의 중국 마사지숍에 빠졌다.
현재 한·중의 민간 교류는 일종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 속 중국’이 커지는 데 반해 ‘중국 속 한국’은 작아지는 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점점 커져가는 양국 교류의 불균형을 바로잡을 기회는 많다. 코로나 유행은 언젠가 종식될 것이고 여행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1인당 GDP 2만 달러 사회를 바라보는 중국은 산업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국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미·중 경쟁이 한·중 관계를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만들 수 있지만 경제와 문화 부문에서 밀착돼온 양국 교류는 이를 해소할 힘을 가지고 있다.
이충형 차이나랩 특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