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모 국가(乳母國家·Nanny State). 복지국가가 커지면서 따라붙는 별명이다. 복지를 구실로 국가가 국민 사생활이나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하는 현상을 말한다. 코로나19 사태는 대한민국을 더욱 '자상한' 국가로 만들었다. 필요 없다는 사람들 지갑에까지 굳이 재난지원금을 꽂아 줬다. 긴가민가한 사람들까지 PCR 검사를 받게 하고, 증상이 있든 없든 입원·입소시키기도 했다. 이런 자상함에 감동하던 사람들이 슬슬 고개를 젓기 시작한다. 아낌없이 내주던 국가도 힘 달리는 기색이 완연하다. 나랏빚이 치솟고, 의료 부담이 한계에 다다랐다. 더 근본적 질문은 따로 있다. 언제까지, 어디까지 전체를 위해 개인의 권리가 희생돼야 하는가.
코로나19 사태가 키운 '유모 국가'
"다 널 위해"라며 기본권 희생 요구
너무나 당당함에 시민은 질린다
청소년 접종 강요는 심리학적 측면도 간과하고 있다. 사람들은 감염을 '어쩔 수 없는 위험'으로 여기지만, 접종 부작용은 '선택에 따른 위험'으로 생각하기 쉽다. 인간은 전자보다 후자에 훨씬 민감하다. 많은 사람이 자동차 사고보다는 비행기 사고에 더 불안해한다. 자동차 이용은 어쩔 수 없지만, 비행기는 안 타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자동차의 65분의 1"이라는 통계(2003년 미시간대 연구팀)를 아무리 들이밀어도 소용없다. 탑승 강요로 여길 뿐이다. 부모의 결정으로 주사를 맞혔는데, 그 아이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부모 입장에선 생각하기도 싫은 결과다. 국가가 "내가 더 잘 알아" 하며 강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힘들더라도 설득이 우선이다.
자상한 얼굴에 감춰진 국가의 억압 본능을 시민들이 이제 눈치채기 시작했다. 정부로선 억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과보호를 스스로 인정하는 부모는 없다. 정부의 알뜰살뜰 보호가 꼭 선의만은 아닐 거라는 의구심도 크다. 보수 집회엔 '살인자'란 딱지를 붙이더니 노동계 집회는 어물쩍 넘어가는 데서 국가의 이중성이 읽혔다. 국가는 기본권 유보를 요구하면서 외친다. "다 여러분을 위해서." 너무나 당당한 태도에 시민들은 방역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느낀다.
코로나19가 유모 국가에 대한 경계심을 키웠지만 대선판의 '모성(母性)' 경쟁은 오히려 더해 간다. 탈모·임플란트 건강보험, 병사 월급 200만원, 출산 부모 월 100만원 지급 등 깨알 같은 소확행과 심쿵 공약들로 넘쳐난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길 없는 국민이 이제 국가의 흰머리를 걱정할 판이다. "근심으로 지새우는 어머님 마음/ 흰머리 잔주름이 늘어만 가시는데/ 한없이 이어지는 모정의 세월." 어떡하나, 염색 번거로움을 덜어준다는 샴푸도 이제 못 쓸지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