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자기 통제 통한 변화를 완수했을 때, 곰은 인간이 되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2.01.06 00:24

수정 2022.01.07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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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의 해에 생각하는 단군신화

홍석창 화백이 그린 정부 표준 단군 왕검의 영정. [중앙포토]

호랑이 해가 밝았다. 호랑이는 새해 결심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호랑이와 달리 인간은 새해 결심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새해 결심을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일단 현 상태에 불만이 있어야 새해 결심을 할 수 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는 고승(高僧)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새해 결심을 할 수는 없다. 새해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현 상태에 대해 불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불만족하는 것도 능력이다. 매사에 만족하기만 해서는 보다 나은 상태를 바랄 수 없다.
 
불만이 많다고 해서 새해 결심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해 결심을 하기 위해서는 과거·현재·미래를 나눌 수 있는 시간관념이 있어야 한다. 그저 뭔가 흘러간다는 식의 죽사발 같은 머리통으로는 새해 결심을 할 수 없다. 과거·현재·미래를 나누고, 한 걸음 더 나아가 1년 12달 365일로 시간을 토막낼 수 있는 잔인함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토막을 내야, 정체 모를 시간이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변한다. 시간이 통제 가능할 때 비로소 “제가 선생님이 아는 과거의 그 유약한 놈이 아닙니다!” “데이트 장소에서 매번 파스타를 흘리던 과거의 그 한심한 놈이 아닙니다!” “비문을 남발하던 그 어설픈 칼럼니스트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곰·호랑이, 결심 가능 동물로 묘사
자기통제 통한 재창조 의지 갖는 것
문명화된 존재로의 통과의례
‘새해 결심’은 인간이 갖는 특권
 
이렇게 분연히 새해 결심을 할 때는 내가 더이상 작년의 자신으로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결기가 담긴다. 결심이란 걸 할 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한때 이유식을 먹으며 옹알이를 하던 조그만 녀석이 ‘결심’같은 것을 하다니, 대단한걸. 제법이야. 방치된 오줌 줄기처럼 의식이 흘러가게 그냥 두지 않고, 무엇인가 하겠다고 마음을 조준하는 일. 이 엄청난 일은 마음에 관제탑을 세워야 가능하다. 그 관제탑은 목표 달성을 방해할 세력을 판별하기 위해 곳곳에 환한 조명을 비출 것이다.
 
그 방해 세력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존재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는 법. 새해 결심을 무너뜨리는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를 구획하고, 그중 한 부분에 관제탑의 역할을 맡기고, 나머지 부분에 기꺼이 관제탑의 지시를 들으라고 요청해야 한다. 이것은 무정부 상태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 정부를 수립하는 일과 비슷하다.
 
새해를 맞아 정부가 그해 예산과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듯이, 정초가 되면 마음은 자신을 특정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결심을 한다. 이때 하는 결심은 결국 자신과의 약속인데, 남에게 하는 약속보다 어기기 쉬운 것이 자신과 약속이다. 아무리 잘 구획해 놓았어도, 자기를 이루는 부분들은 서로 내통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새해 결심의 이행 여부는 결국 자기 통제(self-control)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렸다.


자기 통제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직장에서 승진하기 위해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서?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신의 결점을 고치기 위해서? 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그렇다. 새해 결심은 결국 미래의 자신을 창조하는 행위다. 작년과는 다른 올해의 나를 창조하려는 행위가 바로 새해 결심이다.
 
자기 재창조의 기적이 가능한 것은, 인간이 그저 호르몬의 노예이거나, 경제적 여건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는 단세포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동식물과 달리 인간은 문명을 건설할 수 있고, 그 문명 속에서 살아가며 문명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표어도 있지 않은가. 인간은 문명을 만들고, 문명은 인간은 만든다. 문명화 과정을 거친 인간은 그 과정을 거치기 전의 인간과는 다르다. 인간은 새해 결심을 만들고, 그 새해 결심은 인간을 만든다. 새해 결심을 이행한 인간은 결심을 이행하기 전의 인간과는 다르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고달픈 길을 가려는 이 ‘슬픈’ 자기 재창조 작업이 바로 우리가 아는 단군신화의 핵심이다. 단군신화에서 가장 놀라운 이는 환인이나 환웅 같은 신적 존재들이 아니다. 환웅이나 환인은 원래 본 적도 없는 존재들이니, 무슨 일을 해도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다. 그러나 곰과 호랑이는 다르다. 우리는 호랑이와 곰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 동물원에 가면 호랑이는 죽은 고기를 먹으며 우리 속을 우왕좌왕하고 있고, 곰은 쓸개즙을 착취당하다가 결국 총 맞아 죽는 존재로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고 싶어한다. 그건 그다지 놀랍지 않다. 그들은 아직 인간 세상이 얼마나 개판인지 모르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느 시대나 약간 이상하고 야심적인 존재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정말 놀라운 점은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결심이 가능한 동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결심이 가능하다는 것은 자신의 현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을 나눈 뒤, 사뭇 다른 미래의 자신을 창조해내겠다는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과 호랑이는 바로 그 놀라운 자기 재창조의 결심을 해낸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한국인이라면 다 잘 알고 있다.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만 먹으며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사서 개고생을 시작한다. 이처럼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고양이는 자루에서 튀어나오려고 하고, 개는 목줄에서 풀려나려는 것이 동물의 본성 아니던가.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는 인간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기에, 쑥과 마늘과 어둠을 감수한다. 미래의 목표를 위해 부자연스러운 일을 감수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문명이다. 단군신화의 곰과 호랑이가 겪는 고초는 자연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려는 존재의 몸부림이다. 문명화된 존재로 자신을 탈바꿈하려는 존재의 통과의례다.
 
알다시피 호랑이는 실패하고 곰은 성공한다. 그러나 호랑이가 과연 실패한 걸까. 우리는 단군신화가 호랑이가 아닌 곰의 관점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호랑이의 관점에서 쓰인 단군신화는 사뭇 다를 것이다. 인간이 뭐라고 이 개고생을 감수해야 하나! 유레카! 깨달음이 온 호랑이는 동굴을 뛰쳐나간다. 호랑이가 이렇게 문명을 거부했기에, 신화의 주인공 역할은 문명화의 길을 간 곰에게 넘어갔다.
 
끝내 버텨 인간이 된 곰, 정말 징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곰이 그 고초를 견디고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단군신화의 인간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단군신화의 인간관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아니다. 현대어가 아닌 한문에서 인간(人間)은 ‘인간’을 지칭하지 않고 ‘세상’을 지칭한다. 따라서 홍익인간이란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정도의 일반적인 언술에 가깝다. 단군신화의 진짜 인간관은 웅녀에게 응축되어 있다. 바로, 문명화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는 인간, 미래의 새로운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인내할 수 있는 인간, 변화를 위한 자기 통제를 해내는 인간이 바로 그것이다. 타율에 의해 곰이 동굴에서 마늘과 쑥을 먹었다면 곰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통제를 통해서 그 과정을 완수했을 때, 곰은 인간이 되었다.
 

홍석창 화백이 그린 정부 표준 단군 왕검의 영정. [중앙포토]

그리고 그 곰은 단군을 낳는다. 그 단군의 자손답게 나는 올해도 새해 결심을 해본다. 중년의 인간으로서 나는 시간이 한정 자원이라는 사실을 인지한다. 따라서 부질없는 집착들로부터 놓여나고자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올해 안에 무엇을 기어이 끝내겠다는 결심 같은 건 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학위논문을 쓰는 학생들에게나 어울린다. 한편, 올해가 아니면 영원히 할 수 없는 일들은 올해 안에 하려 할 것이다. 고시 공부를 위해 성교를 90세 이후로 미루는 청년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떤 일들은 그 시절에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게 되곤 한다. 그런 것들 말고는 나의 일상을 수호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변함없이 달걀을 삶을 것이며, 달걀을 다 먹은 뒤에는 그날의 글을 쓰고, 오후가 되면 오랜 시간 걸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가 산책길 커피숍에서 그날의 커피를 마시고, 과묵한 점장이 지키고 있는 작은 책방에 들러 책을 살 것이다.
 
나는 왜 나일까, 같은 질문은 그만하고 사랑이라는 기적에 대해 과감할 것이다. 이러한 새해 결심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크게 탓하지 않을 것이다. 올해는 참다못해 동굴에서 뛰쳐나간 호랑이의 해이니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