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어 14년만에 훈장 받는데..."전범이 무슨 훈장" 50만명 분노

중앙일보

입력 2022.01.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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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연합뉴스

토니 블레어(69) 전 영국 총리가 퇴임 14년 만에 가터 훈장(Order of the Garter) 수상자로 임명된 가운데, “블레어에 대한 훈장 수여를 취소해야 한다”는 의견이 영국 국민청원 사이트(change.org)에 올라와 5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블레어는 ‘전쟁 범죄자’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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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현지시간) 영국 매체 더타임스는 영국 국민청원 사이트에 ‘블레어 전 총리에 대한 가터 훈장 수여를 취소하라’는 글이 가장 인기있는 청원 중 하나가 됐다고 보도했다. 청원 작성자인 앵거스 스코트는 “토니 블레어는 공적 영예, 특히 여왕이 수여하는 것은 어떤 것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당장 그에게 이 영예를 박탈할 것을 청원한다”고 촉구했다.
 
가터 훈장은 공직에서 봉사한 이들에게 영국 여왕이 개인적으로 수여하는 최고의 기사도 훈장으로, 빅토리아 십자훈장과 조지십자상에 이어 두번째 서열의 상이다. 가터 훈장 기사단 멤버는 24명으로 제한돼, 수훈자가 숨져야 신규 수훈이 가능한 희소성까지 갖췄다. 
 
청원자 스코트가 문제 삼은 것은 블레어 재임 시기(1997~2007) 이라크·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이다. 그는 “블레어는 영국 헌법과 영국 사회 구조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고, 다양한 분쟁에 무고한 민간인과 군인을 보내 죽음에 이르게 한 개인적 책임을 져야 한다”며 “그는 이것만으로도 전범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블레어 전 총리는 2001년 9·11 테러 이후 아프간과 이라크를 침공한다는 미국의 결정을 지지해 자국군을 파병한 바 있다. 당시 영국 내에서는 “명분도 실리도 없는 전쟁터로 자국민을 내몰았다”는 비난이 일었고, 퇴임 후에는 전범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달 31일 블레어가 가터 훈장 수상자로 발표되자, 반전 운동가들은 “이라크와 아프간 국민들에게 큰 고통과 실망을 주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참전용사 유가족들은 블레어가 가터 훈장을 받으면, 자신들이 받았던 ‘엘리자베스 십자훈장’을 반환하겠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2020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런던 커킹검 궁에서 배우 앤 크레이그에게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연합뉴스

 
블레어의 수상을 반대하는 이들은 그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이의 불화도 문제 삼았다. 블레어는 1997년 8월31일 교통사고로 사망한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장례절차를 둘러싸고 왕실과 갈등을 빚은 바 있다. 또 퇴임 후인 2010년 출간한 회고록에 여왕과의 사적 대화를 공개해 여왕이 이에 대노한 것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여왕은 전직 총리에게 관행적으로 수여하던 가터 훈장을 블레어에게는 퇴임 14년이 넘도록 주지 않다가 뒤늦게 수상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이 청원으로 인해 블레어 훈장이 취소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영국에선 의회 웹사이트에 올라온 국민청원 중 1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건에 대해서는 정부가 답변을 하게 돼있고 10만 명 이상이 동의하면 하원의원들의 논의 대상이 되지만 이번 청원은 해당 되지 않는다. 더타임스는 “블레어에 대한 이번 청원은 의회 웹사이트에서 작성되지 않아 하원의원들이 이에 대해 논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