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호랑이는 인간이 되는 데 실패했지만, 산신으로서 추앙받는 존재가 됐다. 한반도에 살던 조상은 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고, 산에 사는 강인한 동물도 영물로 신성시했다. 가장 높이 숭배한 게 산신·산신령·산군 등으로 불린 호랑이다. 『후한서』는 동이족에 대해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하고, 호랑이에게 제사 지내며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남겼다. 호랑이는 사악한 기운을 막고 지켜주는 벽사(辟邪)이자 수호(守護)의 상징이 됐다.
학계에선 호랑이가 일본에 대한 저항과 조선을 상징하게 된 계기가 1908년 『소년(少年)』 창간호에 최남선이 그린 호랑이 형상의 한반도 그림부터라고 꼽는다. 이것은 일본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小藤 文次郎)가 1903년 한반도를 토끼 모양으로 형상화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이어 최남선은 1926년 동아일보에 ‘호랑이’라는 7편의 글을 연재하며 호랑이 관련 각종 이야기를 정리하고 “고조선 이전부터 호랑이가 민족의 토템으로 숭배받아 왔다”는 것을 강조해 ‘조선의 표상’으로 규정했다.
중국에서 유행한 그림이 임진왜란 전후로 조선에 전해지면서 19세기부터는 각종 민화에 호랑이와 까치가 등장하는 경우가 급증했다. 특히 조선에서는 호랑이는 바보처럼 우스꽝스럽게, 까치는 당당하게 묘사됐다. 노은희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원은 “호랑이가 우리에게 친근한 캐릭터로 바뀌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백성을 괴롭히는 해독(害毒)으로 도적·귀신붙이와 더불어 호랑이를 들었다. ‘호환(虎患)’이라는 말처럼 맹수인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위용과 용맹함 때문에 사악한 기운을 막아내는 영물이었다. 호랑이에 대한 모순적인 시선은 오랜 기간 공생하면서 자연스레 문화에 흡수된 것이다.
호랑이와 관련된 물건도 많다. 양반가 남자아이가 착용한 호건(虎巾), 무관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 호랑이 흉배, 약재로 쓰인 호랑이 연고 등이 대표적이다. 과거 가정마다 상비약처럼 있던 호랑이 연고는 소염·진통 기능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는데, 정작 호랑이 관련 부위는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다양한 증상에 쓰이면서 만병통치약 같은 이미지를 가져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의학에선 호랑이의 각종 부위가 고급 약재로 쓰였으며, 특히 호경골(虎脛骨·앞다리 정강이뼈)이 큰 인기를 얻었다.
호랑이와 관련된 민속신앙은 지금도 이어진다. 주요 사찰의 삼성각이나 칠성각 등에는 호랑이와 산신이 등장하는 산신도가 있다. 또 십이지(十二支) 열두 동물의 날 중 매월 첫 호랑이 날에 가게를 열면 번창하며, 호환을 피하기 위해 아침 일찍 외출을 자제해야 한다는 등의 민간신앙이 있다. 단오에 쑥으로 만든 호랑이(애호)를 머리에 꽂거나 문에 매달면 잡귀를 막는다고 믿었다.
서울올림픽(마스코트 호돌이)을 계기로 민족의 상징으로 재부상한 호랑이는 2018 평창 겨울올림픽 마스코트(수호랑)나 2020 도쿄올림픽 한국선수단 캐치프레이즈 ‘범 내려온다’ 등을 통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