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09〉
저우, 북한 인사들 만나려고 회담장 떠나
두 번째 회의는 오찬과 함께 시작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오리구이를 키신저의 접시에 놓아주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미국 대통령은 아직도 중국 방문을 희망합니까?” 키신저는 깜짝 놀랐다. 호흡을 가다듬고 “중국 측이 먼저 방문을 요청했다”며 인도차이나, 대만, 한반도 문제를 장황히 설명했다. 듣기를 마친 저우는 “우선 먹자. 오리구이는 식으면 맛이 없다”는 한마디로 분위기를 풀었다. 이어서 문혁(문화대혁명) 얘기를 했다. “정권 출범 10여 년이 지나자 여러 모순이 드러났다. 밑에서부터 위까지 대규모 정풍운동이 시급했다. 마오 주석의 정확한 혁명노선을 발전시키다 보니 과정에 곡절이 많았다. 키신저 박사는 문혁을 중국 내부의 일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이 중국을 이해하고 중국과 관계를 건립하려면 문혁을 이해해야 한다.” 자아비판 형식을 통해 문혁을 일으킨 마오와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도 암시했다. “나는 마오쩌둥 사상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이날 저우는 만찬 시간이 임박하자 자리를 떴다. 배석한 황화(黃華·황화)에게 당부했다. “키신저 박사와 함께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발표할 성명을 작성해라.”
저우언라이가 자리를 비우자 키신저는 당황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라도 베이징을 방문한 줄 알았다. 키신저뿐만이 아니었다. 통역으로 참여했던 전 영국대사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 조차도 “오후에 시작된 총리와 키신저의 2차 회담은 만찬 시간이 되자 끝났다. 회담을 마친 총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 환영 만찬에 참석했다”고 회고록에 남길 정도였다. 당시 베이징에는 중·조 우호조약 1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당 정치국원 김중린과 노동부장 김만금이 체류 중이었다.
7월 11일 마지막 회담은 화기애애했다. 오전 9시, 황화가 새로운 초안을 들고 왔다. 양측의 체면을 살리고, 대만 문제를 쌍방의 관심 문제라고 두루뭉술하게 처리한 내용에 키신저도 만족했다. 몇 자 손본 후 동의했다. “저우언라이 총리와 닉슨 대통령 국가안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1971년 7월 9일부터 11일까지 베이징에서 회담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닉슨 대통령의 열망을 익히 알고 있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해 1972년 5월 이전 적당한 시기에 중국 방문을 요청했고, 닉슨 대통령도 즐거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두 나라 지도자는 양국관계의 정상화와 쌍방의 관심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기로 합의했다.”
까맣게 몰랐던 일본, 가장 먼저 환영 선언
7월 15일, 미·중 양국이 LA와 베이징에서 키신저의 중국 비밀방문과 닉슨의 중국 방문 결정을 동시에 발표했다. 냉전 시대 최대의 뉴스였다. 성명 발표 직전까지 미국의 사전 통보는커녕, 키신저의 베이징 방문 사실도 몰랐던 일본의 반응이 제일 빨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선언했다. 여러 나라의 일본 흉내가 줄을 이었다. 몇 개월 만에 대만의 중화민국 정부는 유엔에서 쫓겨났다.
3개월 후, 키신저의 두 번째 중국 방문은 닉슨 방문의 예행연습이었다. 비밀일 이유가 없었다. 자신의 수석 보좌관 알렉산더 헤이그와 함께 대통령 전용기 타고, 닉슨의 예정 항로인 하와이, 괌, 상하이를 경유해 베이징에 도착했다. 키신저 일행은 숙소에 있는 반미 유인물을 발견하고 중국 측에 항의했다. 보고를 받은 마오쩌둥이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허풍이 심한 사람이다. 반미 표어는 전부 허풍이다. 미국이 우리를 비난한 것도 허풍이긴 마찬가지다. 20년간 우리는 서로 공포만 쏴댔다. 키신저에게 그대로 전해라.” 헤이그가 본의 아니게 주책 떤 것 외에는 별 탈이 없었다.
1972년 2월 21일, 월요일 오전 11시 미 공군 1호기가 베이징 공항에 안착했다. 4시간 후, 저우언라이가 키신저에게 통보했다. “갈 곳이 있다. 대통령과 키신저 박사 외에 미국 기자와 경호원의 동행은 불허한다. 차량도 우리 측에서 준비하겠다.” 말 같지 않은 제의였다. 닉슨은 수락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