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이른바 ‘법관탄핵 정국’으로 치닫던 날이다. 헌정 사상 최초로 법관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탄핵대상이 된 법관은 ‘세월호 재판 개입’ 의혹을 받던 임성근(57·사법연수원 17기)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 범여권은 임 전 부장판사를 두고 “재판에 개입한 반헌법적 행위를 했다”며 탄핵을 의결했다. 반면 국민의힘은 김명수(62·15기) 대법원장 탄핵 카드를 검토했다.
2021년 새해가 밝자마자 국회가 ‘법관 탄핵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중앙일보 [法ON 스페셜 2021]이 올 한 해 법원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던 사건 중 다섯 번째로 살펴볼 순서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재판이다.
① 김명수, 임성근 “탄핵” 발언과 거짓말 파문…탄핵소추 강행
그로부터 20시간 후인 다음 날 아침. 반전이 일어났다. 지난해 5월 22일 면담에서 임 전 부장판사에게 탄핵 발언을 한 게 사실로 밝혀졌다. “그냥 (사표를) 수리해버리면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라는 김 대법원장의 말이 육성으로 공개됐다. 그러자 김 대법원장은 하루 만에 국회와 언론에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해 다르게 답변해 송구하다”고 사과했다.
임 전 부장판사는 2014~2016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으로 재직하며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침몰 당일 7시간 행적’ 칼럼을 쓴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지국장 명예훼손 사건 ▶프로야구 선수 도박 약식기소 사건 ▶민변 변호사 체포치상 사건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그러다 결국 올해 2월 국회로부터 헌정사상 처음으로 법관 탄핵소추를 받은 셈이다.
② ‘6년 유임’ 윤종섭 “행정처에 지적권” 사법농단 첫 유죄
통상 직권남용죄가 성립하려면 공무원이 해당 직무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재판개입이 행정처의 권한이어야 직권남용 혐의도 인정된다는 의미다. 사건에 연루된 법관들이 앞선 재판에서 줄줄이 무죄를 선고받은 이유다. 혐의를 인정하면 ‘판사는 독립적으로 재판한다’는 헌법 103조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사32부의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두 법관에게 “대법원장(법원행정처)에게는 일선 법관에 대해 재판 지연 등 재판 사무에 대한 지적(指摘)할 권한이 있다”며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판결 직후 일각에선 “헌법상 법관 독립 원칙에 위배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재판장에 대한 논란도 불거졌다. 사건을 맡은 재판장이 올해 법원 정기 인사에서 최장 3년 근무 관행을 깨고 서울중앙지법에 6년째 유임된 윤종섭(51·26기) 부장판사였기 때문이다.
③ 윤종섭 판례 깨지나?…임성근 2심 “지적권은 헌법 위배”
그러면서 판사의 지적 권한을 인정한 하급심인 중앙지법 형사32부의 판결을 비판했다. 윤 부장판사의 판결처럼 법원행정처의 법관에 대한 재판사무 지적권을 인정하게 되면 헌법상 재판의 독립에 정면으로 위배한다고 결론 내리면서다. 판결문에 각주로 다른 재판부의 판결 사건번호를 여러 차례 적시해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④ 헌재, 첫 법관 탄핵청구 “퇴직해 실익없다” 각하
반면 헌법재판관 3인의 다른 의견을 내놨다. 유남석, 이석태 김기영 재판관은 “피청구인의 행위가 얼마나 중대한 헌법 또는 법률 위반인지 규명하는 것은 파면 여부 자체에 대한 판단 못지않게 탄핵 심판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라며 본안 판단에 나아갈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다.
⑤ 첫 법관탄핵 무위에도…양승태 재판은 200회 코앞
이 밖에 전·현직 법관들은 하급심 및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1·2심 무죄를 받은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은 지난 14일 126번째 공판을 거쳤다. 재판 과정에서 잡음도 많았다. 임 전 차장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다”며 기피 신청을 내는 등 반발에 나섰기 때문이다. 임 전 차장 재판은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의 1심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36부(부장 윤종섭)가 맡고 있다.
2019년 2월 구속기소됐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은 지난 22일 무려 185회 공판기일을 진행했다. 법관 정기 인사에 따른 재판부 교체로 공판 갱신 절차를 거치면서 재판이 지연된 때문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 재상고심 재판을 지연하는 등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으로 고영한(66·11기), 박병대(64·12기) 전 대법관과 함께 재판을 받고 있다. 다만 여전히 수십명의 증인이 남아 있는 상태여서 내년까지도 1심 결론이 나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