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영(36·가명)씨는 6년 전 가을의 분노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2015년 10월 직장의 30주년 행사가 열린 경기도의 한 골프장 VIP룸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후원회에서 일하던 수영씨는 후원회 이사이자 의사였던 A씨(60대)의 황당한 요구를 들었다. 며칠 전 행사를 망친 것에 책임을 묻겠다면서 회초리를 구해오라고 한 것이다. 수영씨가 움직이지 않자 “왜 가져 오지 않으냐”며 윽박질렀고 1m가 넘는 나뭇가지를 구해오자 “몇 대 맞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나뭇가지로 엉덩이 찌른 60대 의사
“A씨가 나뭇가지로 엉덩이를 찔렀고 ‘왜 이렇게 살이 쪘나’며 양쪽 옆구리를 주물렀어요. 골프장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도 신체적 성희롱을 했어요. 그전에도 허벅지를 탁탁 치거나 손으로 꼬집는 일이 많았죠.”
‘작은 전쟁’을 시작하다
2015년 사건 다음날, 수영씨는 후원회 사무국장에게 성추행 사실을 알렸다. 이후 A씨가 쓴 사과문이 전달됐다. 종이 한장에 7줄로 적힌 글엔 ‘깊이 후회하고 사과드린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데, 수영씨가 기억하는 사실과 A씨가 인정한 사실은 달랐다. ‘회초리를 가져오라곤 했지만 사용하지 않았다’는 취지였다. 직장에서 조사·징계를 하지 않는 사이 A씨는 본업인 의사로 돌아갔다.
그냥 잊어야 하는 건가. 분노와 고민 끝에 A씨를 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그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진실을 밝히려던 수영씨의 기대는 무너졌다. 2017년 서울중앙지법은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제출된 증거만으로는 추행을 인정하기 어렵고 정황에 대한 일부 거짓 진술이 의심된다”는 취지였다. 법원은 A씨를 더 믿고 있었다. 검찰이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직접적인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뿐이다”며 기각됐다.
피해자 덮친 ‘무고’…그리고 공황장애
다시 용기를 냈다. 이번엔 민사였다. 2018년 A씨를 상대로 50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A씨의 성희롱 불법과 무고를 주장했지만, 1심과 2심에서 모두 기각됐다. 공황장애가 더 심해졌고, 버텨보려 했던 직장 생활도 그만두게 됐다.
“끝은 내가 정한다”
그리고, 지난달 25일 수영씨의 6년 전쟁에 반전이 시작됐다. 대법원이 민사 재판의 결과를 뒤집고 사건을 파기환송한 것이다. 대법원 제3부의 판단은 수영씨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심판이었다.
“VIP룸에서의 직장 내 괴롭힘으로 주장된 사실관계는 A씨도 다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수영씨가 후원회에 피해를 신고하고 수사기관에 A씨를 고소한 시점과 진술 등을 종합하면 성희롱에 대한 수영씨의 주장도 사실일 고도의 개연성이 증명되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원심판결이 직장 내 괴롭힘 또는 성희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
“직장 내 성희롱”…대법원이 바로잡은 정의
승소 판결을 받았지만, 수영씨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또 다른 박수영’을 위해 관련 단체를 후원하고 직접 활동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수영씨는 “성범죄 피해자가 웃거나 행복해서는 안 되고, 늘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것처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그 간절한 소망이 이뤄질 때, 수영씨의 전쟁도 끝날 것이라는 다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