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최병훈의 경계허물기

중앙일보

입력 2021.11.30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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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나?”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구마 겐코(隈研吾·67)는 2000년 일본 도치기현(栃木県)의  돌미술관 설계를 의뢰받고 이렇게 자탄했다고 합니다. 원래 ‘돌’이라는 건축 재료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던 그는 우연히 이 설계를 주문받고 장인 2명과 함께 일을 시작했는데요,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돌이란 게 이렇게 재미있구나’ 하고 느낀 것이었죠. 어쨌거나 뒤늦게 ‘돌’이라는 재료의 매력과 장인과의 협업에 푹 빠졌던 구마 겐코는 훗날 이 프로젝트로 이탈리아의 국제건축상을 받습니다.
 
돌과 나무와 흙.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가장 흔한 자연적인 재료입니다. 우리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이 흔한 재료가 사람의 손을 거쳐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을 만나기도 합니다. ‘돌과 나무란 게 이렇게 재미있구나’.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지난 12일 개막한 최병훈(69) 개인전은 간만에 이런 감흥을 불러일으킨 전시로 꼽을 만합니다. 돌과 나무로 만든 책장과 사이드테이블, 콘솔, 아트벤치 등 아트퍼니처(art furniture) 30여 점을 공개했는데요, 두 재료의 상반된 성질을 대담하고 조화롭게 풀어낸 작품들이 차분한 마음으로 전시장을 오래 서성거리게 합니다.
 

최병훈 개인전 ‘침묵의 메시지’ 전시장 전경. 이은주 기자

작가는 자연석과 수석을 나무책장 아랫부분 지지대로 놓거나 수납공간 중간중간에 끼워 넣었는데요, 그것은 마치 책장에서 돌이 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돌에서 나무가 자라난 것처럼 보입니다. 거친 질감의 수석과 유려한 곡선의 옻칠 나무가 ‘하나’된 사이드테이블, 인도네시아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아트벤치는 원시와 현대, 자연과 인공의 팽팽한 균형감으로 눈길을 끕니다. 예술과 공예, 디자인의 경계를 넘어서 만들어진 ‘가구’들은 그 어느 테두리에도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설치예술 작품이 되었습니다.


최병훈은 1980년대부터 가구 디자인과 예술의 결합을 추구해온 작가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미국), 비트라 디자인미술관(독일), M+미술관(홍콩) 등 세계 유수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됐고, 지난해 11월 개관한 미국 휴스턴 미술관 신관엔 그의 조각 ‘선비의 길(Scholar’s Way)’이 영구 설치됐습니다. 당시 미술관은 올라퍼 엘리아슨, 아이웨이웨이 등 세계적인 거장 8명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했는데요, 그의 아트퍼니처 작품만을 보고 조각을 만들어 달라고 했죠. “내게 장르 구분은 부질없다”는 작가의 믿음이 옳았음을 바깥 나라 미술관이 나서 입증해준 셈이었습니다.
 
“소재든, 장르든 울타리에 갇히거나 아집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그는 “나를 마음껏 표현하기 위해 계속 실험을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모든 경계를 허물고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고요한 내면의 힘”이라고 했는데요, 그 ‘침묵의 메시지’ 직접 들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