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부산을 방문한 나는 마중 나온 부산민주공원 학예실장 S와 함께 복국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폭풍 수다를 떨었다. 이런 걸 요즘 말로 ‘라떼를 시전한다’라고 한다지.
부산 동구의 새 공공미술
예술과 쓰레기 사이 논란
20세기 부산의 흔적 다뤄
기억을 담는 예술의 가치
예술과 쓰레기 사이 논란
20세기 부산의 흔적 다뤄
기억을 담는 예술의 가치
2~3년에 한 번 정도 부산에 간다. 부산은 경상도 시골 출신인 아버지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지게를 벗어 던지고 무작정 기차를 타고 가서 건설노동자의 삶을 시작한 곳, 식민지 시절 만주와 일본을 떠돌던 아버지가 해방 후 귀환하여 정착한 곳,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어머니와 만나 결혼을 한 곳, 그리고 내가 태어난 곳으로, 내게는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부산에 가면 언제나 마음이 아련해진다.
부산 동구가 초량천을 생태하천으로 복원하면서 ‘초량천 예술정원’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모두 작품 여섯 개가 설치돼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최정화 작가의 ‘초량 살림숲’이었다. 냄비·바구니·고무 대야·화분·플라스틱 부표…. 폐품을 꼬치처럼 꿰어 6m 높이로 쌓아 올린 대형 설치작업인데, 한눈에 봐도 최정화표였다.
듣자니까, 이 작품 역시 흉물 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지역언론 기사를 검색해보니 ‘예술인가 쓰레기 더미인가’(부산일보), ‘조형물인지 고철더미인지’(시사저널)하는 자극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공공미술에서 흉물 논란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7년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 신발 3만 개를 늘어놓은 ‘슈즈 트리’(작가 황지해)다.
공공미술은 공공장소에 설치한 작품인 만큼 당연히 대중의 반응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의 안목과 대중의 취향이 충돌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하지만 성격상 어느 한쪽 편만을 들 수는 없는 법이다. 이는 공공미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최정화의 작업을 보는 순간, 나는 어릴 적 기어 올라가던 동대신동 산비탈의 피난민촌이었던 외갓집과 외삼촌이 예비군 훈련받으러 간 구덕운동장이 저기 발아래로 굽어 보이던 풍경, 드럼통 뒷간과 외갓집 점방 천장에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던 파리 떼, 노총각이었던 외삼촌이 곰보 외숙모에게 늦장가를 든 일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 한 조각이 기억의 열쇠가 돼준 것과도 같았다.
그런 점에서 최정화의 작업은 기억의 예술이다. 나는 21세기 국제도시 부산이 과거의 기억을 지우지 않고 잘 간직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도시의 기억과 기억의 예술이 공존하기를 바란다. 최정화 작가 자신도 부산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을 초량동에서 보냈다고 한다. 나는 최정화 작업의 흉물 논란에 판관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처럼 나이 먹은 출향민에게 고향의 기억을 담고 있는 작업을 만나는 것처럼 반갑고 감동적인 경험은 없다는 사실만은 증언하고 싶다. 좌담을 끝내고 찾은 자갈치시장은 인적이 끊어져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