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1936년 2월 현재의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천석꾼 집안이었다. 조 목사의 부친인 조두천씨는 50년 5월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이 일로 집안이 크게 기울었다고 한다.
아직 기독교를 잘 알지 못했던 고인은 부산에서 우연히 미국 선교사 켄 타이스가 인도하는 부흥회 천막에 들어섰다. 부흥회에서 고인은 난생처음 눈물을 쏟으며 통곡했다고 한다. 부흥회를 마친 뒤 고인을 만난 타이스 선교사는 고인의 영어 실력에 깜짝 놀랐다. 그때부터 고인은 타이스 선교사를 따라다니며 영어 설교를 우리말로 통역하는 일을 했다. 타이스 선교사는 오순절교회인 ‘하나님의성회’ 소속이었다.
고인은 신학교 입학 동기생으로 최자실(1915~89) 목사를 만났다. 그는 훗날 조 목사의 장모가 된다. 최 목사는 오순절 신앙에서 성령 세례의 증거로 보는 방언을 고인이 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고인은 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됐다. 최 목사(당시 전도사)와 함께 서울 은평구(당시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가정예배를 시작했다. 당시 대조동은 달동네로 불리던 빈민촌이었다. 두 사람은 사과 상자에 보자기를 씌워 강대상(설교대)을 만들고 온 동네에 예배를 알렸다. 가족을 제외하면 창립 예배에 참석한 사람은 밭일하다 비를 피하려고 들어온 여성 노인 한 명이었다.
고인과 최 목사는 61년 서대문에서 두 번째 교회를 개척했다. 62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최 목사의 둘째 딸 김성혜(전 한세대 총장)씨와 결혼도 했다. 3년 뒤에는 재적 교인 수가 3000명을 넘었다. 다시 3년 뒤에는 재적 교인 수가 8000명을 웃돌았다. 늘어나는 교인 수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서울 여의도에 교회당을 신축했다.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교회였다. 73년 건물을 완공하자 서대문 교회의 교인 8000명이 이곳으로 이동했다. 이때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 시대가 열렸다.
조 목사는 ‘삼중축복’ ‘오중복음’ ‘4차원의 영성’을 내세우며 교회를 일궜다. 삼중축복은 예수를 잘 믿으면 ▶영혼은 구원을 받고 ▶하는 일마다 잘 되고 ▶건강도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이다. 오중복음은 중생(거듭남), 성령 충만, 신유, 축복, 재림(다시 옴)의 복음을 가리킨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교인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78만 명에 달했다. 초기에는 방언과 병자 치유를 강조하는 조 목사의 목회 활동에 대해 기독교계 내부에서 이단 논쟁도 있었다. 한때는 기성 교단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당시 장로교회에서 영향력이 컸던 한경직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양적 성장을 감안할 때 그 교단을 더 이상 이단으로 부를 수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93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등재됐다. 당시 재적 교인 수는 70만 명이었다. 조 목사는 평양에 심장병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 건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98년에는 국민일보를 설립했다. 사단법인 ‘선한사람들’을 세워 인권·환경·아동복지 활동을 했다. 2008년 이영훈 목사를 후임 담임목사로 추대하고 고인은 원로목사가 됐다.
유족으로는 세 아들(조희준·민제·승제)이 있다.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 마련했다. 조문은 15일 오전 7시부터 받는다. 장례예배는 오는 18일 오전 8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한국교회장으로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