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각] 비뚤어진 사진 욕심…해바라기 100개 뜯겨나갔다

중앙일보

입력 2021.09.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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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호로고루 유적지 인근에 심어진 해바라기가 사람 얼굴 모양으로 훼손돼 있다. 김성룡 기자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호로고루 인근 3만㎡에 조성된 해바라기가 만개해 연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8일 호로고루 유적지를 찾았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격상으로 올해 축제는 취소됐지만, 주차장에는 꽤 많은 차가 주차돼 있었다. 연천군에서 주최하는 호로고루 해바라기 사진 공모전 때문인지 전문가용 사진기를 든 사진작가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호로고루 너머로 지는 일몰과 해바라기를 담으려는 사진작가들로 주말 저녁엔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한다. 
 

웃는 표정과 찡그린 표정의 해바라기. 김성룡 기자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김성룡 기자

해바라기와 호로고루 유적지를 함께 담던 중 해바라기들 사이로 기괴한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줌을 당겨보니 누군가 눈, 코, 입 모양으로 해바라기 씨를 뽑아 만든 사람의 얼굴 모양이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그런 '얼굴'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두 시간 취재를 하는 동안 얼핏 본 것만도 100여 개가 넘었다. 무표정한 얼굴, 웃는 얼굴, 찡그린 얼굴, 영어 이니셜, 이름인 듯한 한글, 하트 모양 등등 해바라기에 새긴 모양도 작품(?)의 수준도 가지각색이었다. 

사림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한글이 적힌 해바라기. 김성룡 기자

이름으로 추정되는 영어 이니셜과 '복' 자가 새겨진 해바라기. 김성룡 기자

 
일부 관광객들은 사람 얼굴 모양의 해바라기들을 보고 '재밌다'는 반응을 보이며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또 다른 관광객들은 '멀쩡한 해바라기를 왜 훼손했냐'며 불편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처음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규모해바라기밭이 조성된 곳에서 유행처럼 이런 '얼굴 만들기' 바람이 불고 있다. 

호로고루 유적지를 찾은 한 관광객이 해바라기를 촬영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자연이 좋아서, 자연을 눈과 사진기에 담으려 먼 곳까지 찾아와서 굳이 이렇게 자연을 훼손해도 되는 것일까? 몇 해 전 한 생태 사진작가는 오목눈이 새끼와 어미의 극적인 장면을 담기 위해 둥지 주변 나무를 자르고, 아직 어린 새끼들을 꺼내 나뭇가지에 앉혀서 연출한 사진을 보란듯이 전시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했다. 그는 "법적 하자가 없다", "예술로 봐 달라"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아 더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각양각색의 얼굴을 하고 있는 해바라기. 김성룡 기자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주인공 월터는 히말라야 고산에서 전설적인 사진가 숀 오코넬을 만난다. 오랜 시간 기다리던 눈표범이 파인더에 나타났지만 숀 오코넬은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그렇게 눈표범이 사라진 뒤 숀 오코넬은 월터에게 사진을 찍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카메라가 이 중요한 순간을 방해하기 때문이야. 그냥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은거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재미라는 이름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호로고루 유적지에 해바라기밭이 조성돼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호로고루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구려의 성벽이다. 김성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