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치욕
류성룡이 누구인가. 임진왜란 발생 직후 영의정에 임명된 재상이자 조선의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책임자였다. 그런 류성룡에게 명군의 야전 사령관이 곤장을 치겠다고 덤빈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류성룡의 모습이 민망했는지 이여송은 형장(刑杖) 집행을 멈춘다. 하지만 류성룡은 훗날 『징비록(懲毖錄)』에서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고 당시의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심경을 토로한 바 있다.
왜군과 강화 추진한 중국에 애원
군사력 빈약한 조선의 궁여지책
정유재란 터지자 왕부터 피란 생각
최근 아프간의 비극마저 떠올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 돕는 법”
지도자 무능과 부패 늘 경계해야
군사력 빈약한 조선의 궁여지책
정유재란 터지자 왕부터 피란 생각
최근 아프간의 비극마저 떠올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 돕는 법”
지도자 무능과 부패 늘 경계해야
이여송의 오만, 류성룡에 “무릎 꿇어라”
이여송은 류성룡 등을 질타하면서 군량 문제를 핑계 삼았지만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 5만여 명은 1592년 12월에 조선에 들어왔다. ‘일본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일본군을 조선에서 저지하여 요동(遼東)을 보호하는 것이 참전의 주된 목표였다. 이여송의 명군은 1593년 1월 7일 평양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전세는 역전됐고,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했던 일본군은 남쪽으로 후퇴한다. 사기가 오르고 자신감이 넘쳤던 명군은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한다. 하지만 1월 20일, 파주의 벽제(碧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의 역습에 휘말려 참패하고 만다. 이여송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자신도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는다.
명군 지휘부는 벽제전투 패전을 계기로 사실상 일본군과의 전투를 포기한다. 그들은 싸움 대신 강화(講和)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병력 손실과 전비(戰費) 부담이 커지고 장병들 사이에서 염전의식(厭戰意識)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또 비록 벽제전투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평안도 선까지 북상한 일본군을 한양 부근까지 밀어낸 이상 자신들의 참전 목표는 이미 달성됐다고 생각했다. 일본군이 명나라를 향해 다시 진격해 올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굳이 일본군과 계속 싸워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너희가 직접 싸워라, 더는 원조 없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말고는 전력(戰力)이 몹시 부실한 상태에서 조선은 명군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명군 지휘부가 일본과 협상하겠다고 고집하자 선조는 ‘충격요법’까지 구상했다. 일본군에게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조선이 항복하면 일본군이 협상을 그만두고 다시 요동을 향해 북상할 것이고, 그럴 경우 명도 어쩔 수 없이 일본군과 다시 전투를 벌일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계책이었다. 졸렬하기 짝이 없지만, 자위(自衛) 능력이 없는 나라의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아, 존망의 여부가 전하의 행동에 달려 있는데 중전께서는 날 잡아 떠나실 것이고 경보(警報)가 있으면 전하께서도 움직일 것이라 합니다. 전하께서 마부들을 시켜 황해도로 물자를 나르는 행렬이 길에 이어진다는 소식에 의혹을 품게 되었습니다. 저자거리의 백성들도 쌀을 내서 군수(軍需)를 돕는데 내수사(內需司)의 포목을 은(銀)으로 바꾸라고 명하시니 전하께서는 그 은을 어디에 쓰시려는 것입니까? 적이 오기 전에 위망(危亡)의 화(禍)가 이른다는 것을 전하께서는 듣지 못하셨습니까.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당시 선조는 일본군이 재침해 올 경우 한양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여겨 한편에서는 북쪽으로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선조가 미리 물품을 옮기고 왕의 개인 금고인 내수사에서 포목을 덜어내어 은으로 바꾸려 했던 사실이다. 백성들은 쌀을 염출하여 군수에 보태는데 왕은 피신하려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신료들에게서 비판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실제로 1597년 6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일본군이 천안 부근까지 북상하자 선조는 중전과 왕실 가족들을 먼저 피난시키려고 했다. 조정의 고위 신료들 가운데도 가족을 피신시키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지방 수령과 무관들도 잇따라 사직서를 제출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왕과 신료들이 먼저 도피한다는 소식에 백성들도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도성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국왕은 의지 없고 신하는 도망갈 궁리”
선조는 할 말이 없었다. 일찍이 명과 일본이 강화협상을 시작할 때부터 명군 지휘부에게 싸워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선조가 막상 정유재란이 터지고 일본군이 다가오자 또 다시 한양을 버리고 피신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스스로 앞장서서 일본군에게 맞설 생각은 하지 않고 명군에게만 매달리려 했던 그에게 안팎에서 비난과 질타가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왕으로서의 권위가 더더욱 실추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다행히 전쟁은 끝났지만, 정유재란 무렵 선조와 일부 신료들이 보였던 자세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것이었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무너지고, 탈레반을 피해 공항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이 겪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베트남의 사이공이 함락될 때보다 더 치욕적’이라며 미국의 오판과 미군의 무책임한 철수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하지만 붕괴된 아프가니스탄 정부 고위 지도자들의 행태와 지리멸렬한 군대의 실상을 들으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대통령은 차량 네 대에 돈을 가득 싣고 허겁지겁 달아났고, 장부상으로 병력이 30만을 넘고 수십조원에 달하는 미국의 군사 원조까지 받은 군대가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무너졌다고 한다.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 거기에 정파의 분열까지 더해지면서 미국의 천문학적인 원조도 소용이 없었다. “아프간이 아프간을 위해 스스로 싸울 때”라고 했던 바이든 대통령의 냉정한 일갈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