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승부 가른 정보전
논란은 체포 작전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졌다. 이조판서 이장곤(李長坤·1474∼1519)은 함경도 현지에서 대군을 동원하여 잡으려 할 경우, 관련 정보가 사전에 유출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이장곤은 당시 한양에 있던 무장 이지방(李之芳)으로 하여금 극소수의 정예병을 이끌고 달려가 속고내를 급습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보안(保安)을 유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특공대를 파견하는 작전이었다. 중종과 신료들은 모두 이장곤의 제안에 찬동했다.
초탐·사후선 등 정보수집선 운용
부대도 바닷가 출신 위주로 구성
병자호란 전후에도 첩보전 무시
“오랑캐와 화친 없다” 명분만 고집
정보·보안의식이 국가 운명 좌우
최근 간첩·해킹사건 비추는 거울
자국의 영토와 백성을 침탈한 외적을 붙잡기 위해 왕과 대신들이 합의했던 특공작전을 ‘도적의 술책’이자 ‘패도’로 규정하고 중지하라고 요구했던 배경에는 이 같은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국가안보를 위한 용병술(用兵術)까지 이처럼 교조적이고 근본주의적으로 매도하는 풍토에서 정보(情報)를 중시하고 보안을 강조하는 인식과 자세가 자라나기는 어려웠다.
조광조와 그를 존숭하던 사림들은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1545년(명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맞아 훈구파(勳舊派)와 외척(外戚)들에 의해 죽음을 맞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사림들은 조정에 복귀하여 집권 세력으로 등장한다. 선조대 사림들은 과거 집권세력이 남긴 적폐(積弊)를 청산하고 왕도정치를 추구하려 했다. 하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사림들이 분열되어 정쟁이 심화되는 와중에 1592년 일본의 침략이 밀어닥친다.
조선 산천 훤하게 꿰고 있던 일본군
물론 조선군 가운데도 예외적인 지휘관이 있었다. 바로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전투에 임할 때마다 초탐선(哨探船)·사후선(伺候船)이라 불리는 수많은 정보 수집선을 활용하여 일본 수군의 동향을 탐지하기 위해 부심했다. 또 이순신 휘하 병사들의 상당수는 바닷가 주민들로서 전라도·경상도의 조류 간만(干滿)이나 암초의 소재 등 해로(海路) 사정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이순신은 이런 부하들을 뛰어난 수군으로 편성·조련하는 데 역량을 발휘했다. 요컨대 자신을 잘 알고 적도 잘 알려고 노력했던 이순신의 자세야말로 해전에서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비결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정보 수집과 보안 유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지만, 조선은 곧 이어 청의 침략을 맞는다.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건주여진인(建州女眞人)들의 정보 수집 능력과 간첩 활동 역량은 매우 뛰어났다. 17세기 초, 누르하치는 만주 지역의 명나라 성(城)들을 공격할 때마다 미리 간첩을 들여보내 내부를 정탐하고 민심을 교란시켰다. 내통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방어 태세가 이완되면서 성들은 누르하치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건주사지(建州私志)』에는 “건주여진인들은 간첩 활동이 워낙 뛰어나서 내통하는 자들 때문에 견고한 성도 앉은 채 함락 당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을 둘러싸고 명과 건주여진의 압박이 심화되고 있던 무렵 광해군이 보여준 정보와 보안에 대한 인식은 이채로운 것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척후와 간첩 활동을 통해 건주여진과 명의 동향을 탐지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조선의 내부 정보와 동향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심했다. 광해군이 이렇게 여느 국왕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일선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일깨운 보안의 중요성 망각
내정 실패에 발목이 잡혀 광해군이 쫓겨난 이후 들어선 인조 정권의 정보와 보안에 대한 인식은 크게 후퇴한다. ‘오랑캐’ 건주여진(후금·청)과의 화친이나 타협을 거부했던 인조대 척화신(斥和臣)들은 용병과 관련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교조적인 자세를 드러내기도 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을 밤에 급습하여 물리치자는 주장이 제기됐을 때 척화신들 중에는 “야간에 적을 공격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했던 사람도 있었다. 일찍이 조광조가 속고내를 잡기 위한 특공작전에 반대했던 것의 판박이였다.
1636년 봄, 조선 신료 가운데는 조정의 동향과 분위기를 청 사신 용골대(龍骨大) 등에게 넘겨준 자가 있었다. 반면 청과의 관계가 파탄으로 치닫고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던 같은 해 가을, 최명길 등은 청의 동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심양(瀋陽)에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척화신들은 격하게 반대한다. “오랑캐와 화친이 끝난 이상 어떤 접촉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반대의 명분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앞에 두고 내부 보안은 취약한 상황에서 적에 대한 ‘정보’는 없이 ‘태도’만 존재했던 것이다.
요즘은 어떤가. 최근 국가정보원에 의해 ‘충북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고, 지난달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등 국가 핵심 시설에 대한 북한의 해킹 공격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보도된 바 있다. 시대와 환경은 달라졌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내부 보안을 철저히 다지고 외부 정보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